파리의 가을

출발

by 혜령

어렵게 시간을 모았다.

출발 전까지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르는 시간을 버티며 드디어 출발 선에 왔다.

대전에서 올라오는 딸아이를 공항에서 만났을 때야 비로소 정말 떠난다는 실감을 했다.

여권을 잘 챙기라는 당부를 매일 하다시피 한 것은 그전에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아 힘든 일을 겪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임시 여권 발급이 가능했지만 촉박한 시간에 밀려 따로 출국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아들이 먼저 일본에 가있어서 나는 출발하기로 했고 여권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딸아이는 다른 공편을 이용해 여행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여권을 먼저 챙기라는 당부는 필수였다.

공항을 채우는 공기의 입자들은 뭔가 다른 성분이 있다고 느끼게 한다. 반짝이지 않지만 빛나는 밀도 높은 무엇인가가 점차 폐부로 유입되는 기분이다. 바깥세상과 유리문 하나로 조금은 다른 세상에 유입된 것 같은 기분이 확실해진다.

유리문 밖의 나는 없다.

유랑의 통로에서 출발을 준비하는 알 수 없는 연령대의 내가 서있을 뿐이다.

엉성한 옷차림도 단단히 묶은 운동화끈만 확인하면 문제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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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길 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두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인사말도 필요 없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자유롭다. 어두워진 방 안에 짐을 풀고 창을 열면, 있는 그대로의 무게를 감당하는 얼굴과 마주 선다.

비가 오거나 노을이 깊거나 푸른 밤이 별과 함께 낭하도 그냥 마주하면 된다.

말하거나 웃지 않아도 되고 구름에 비치는 마음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작고 여위어 있는지 묻지 말고 그대로 둔다. 창밖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이 반갑다.

여행 중에 창을 만나면 나를 만난 듯 기특하고 행복하다. 온전히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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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파리 여행에서 남긴 글이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출발한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벅차다. 서른 중반이 된 아이들은 파리 여행이 처음이다.

아직은 결혼 전이라 가능한 여행이니 마음껏 떠나볼 예정이다.

든든한 동행으로 더없이 행복한 출발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