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각인된 것은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아이는 한 남자의 깊은 병색을 슬퍼하는 주변 어른들의 절망을 어찌할 바를 모르며 조용히 주시한다. 어른들은 저마다의 슬픔에 열중하고 아이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 누가 저 아이를 좀 안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쉽게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내를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외모를 가졌으나 영민하고 검소하며 우아한 몸가짐을 가졌다고 그의 아버지에게 소개하는 편지에 썼다. 가사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으며 낭비벽이 없다고도 소개했다.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정직한 사람으로서의 평가로 느껴졌다. 어린 시절 쇤부른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 내외와 자녀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애정을 표했던 그는 청년이 되어 콘스탄체 베버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환영받지 못한 결혼을 이루기 위해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요구하는 혼인서약서까지 작성하게 된다. 슈테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지만 콘스탄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펄트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외모로 소개된 그녀지만 모차르트와 사랑으로 가정을 일구어 내었고 남편의 신임도 두터웠다. 다만 여섯 명의 아이를 낳으며 몸이 쇠약해졌고 9년간의 결혼생활에서 영아기를 무사히 넘긴 두 아들만이 그녀의 곁에 남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모차르트 역시 일곱 명의 형제들 중에 누나 난네를과 둘만이 살아남았다. 영아 사망률이 60퍼센트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모차르트는 양가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지만 돔 가세 5번지 2층에 살 때는 여러모로 황금기였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하고 성공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넓고 화려한 집에서 살았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아내는 스물둘이었다. 이 집에서 사는 동안 열일곱 살의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찾아와 피아노 연주를 했으며 하이든의 방문도 잦았다. 위대한 음악가 3인의 흔적이 남은 장소이다.
35세의 아쉬운 생을 마감했던 장면은 최고의 비극에 가깝다. 고정 수입이 없었고 불행한 상황이 겹치던 1791년 12월 6일 오후, 하루종일 진눈깨비가 날리며 춥고 추적추적한 밤에 슈테판 성당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