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성당 뒤편의 보관소에 있던 모차르트의 시신은 자루에 담긴 다른 신들과 함께 표지도 없는 구덩이에 던져졌다.
말년의 모차르트는 장례식을 치를 돈도 묘지를 살 돈도 없었으므로 여러 구를 한꺼번에 파묻는 샤흐트 구역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빈 시민들은 60년이 지나서야 이 비극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무도 구덩이의 위치를 기억할 수 없었고 유전자 감식이 빛을 발하는 현재에도 묘지의 기능을 잊은 생 마르크 공동묘지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8세기의 빈이 실망스러웠다. "신은 우리에게 그를 보내주었다가 다시 데려갔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자격이 없었지만, 그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라는 필립 솔레르스의 애도만이 남았다.
남겨진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황제 레오폴드 2세에게 자비와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며 아이들과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썼다. 그 후 콘스탄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외교관과 재혼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그녀는 새 남편으로 하여금 전 남편의 전기를 쓰게 한다.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하고 남긴 그의 누나 난네를과 콘스탄체의 노력으로 남은 전기는 모차르트의 불씨를 살리는 다행한 일들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둔 곳은 <레퀴엠>을 작곡하다 끝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라우헨슈타인 가세 8번지, 지금은 스테플 백화점이 화려하게 들어서있다. 후문에 모차르트가 사망한 곳이라는 안내판만 붙어 있다.
그의 결혼식이 있었고 마지막엔 그의 시신이 누워있었던 슈테판 성당은 화려하고 다정한 날들을 보내던 돔 가세 5번지에서 바로 보이는 거리에 있다. 영혼이라도 그 시간 그곳을 다녀갔기를 바랄 뿐이다.
모차르트의 아들 둘은 결혼을 했으나 자식이 없어 그 아들 대에서 가문은 끊기고 말았다. 유럽 어디에도 모차르트의 후손은 없다.
잘츠부르크의 구시가지 광장을 걸었다. 레지던스 광장을 통해 대성당의 어깨 위로 노을이 앉는다. 마차는 또각또각 말밥굽 소리를 내며 시가지를 누빈다. 곧 카피텔 광장의 황금색 공이 보이고 호헨잘츠부르크성을 배경으로 커다란 체스판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분주하다.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고향을 힘들어했던 모차르트. 종교를 입은 권력의 칼날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어두워지는 하늘빛을 등지고 모차르트가 서 있다. 그는 여전히 작곡을 위해 오선지와 펜을 들고 있다.
레지던스 광장의 이 동상은 모차르트를 사랑했던 바이에른의 왕 루드비히 1세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모차르트는 고향으로 돌아와 그를 힘들게 한 고향을 빛내고 있다. 오스트리아 전체가 모차르트의 후광을 입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빈에서도 모차르트의 그림자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 남편의 전기를 남긴 여인 콘스탄체와 모차르트의 두 아들도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였다니 마음이 좋았다.
그 날 그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바치는 칸타타를 지휘했다는 것도 모차르트에게 위안이 되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