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 밤, 맨발의 추격전

여성폭력을 멈춰주세요

by 연두빛초록


어느 여름날이었다.

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밤 늦게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선선히 간지럽히며 불어오는 여름 밤바람이 시원했고, 때마침 소나기가 지나간 길엔 진한 풀향이 가득했다.

말할 수 없는 비밀 OST중 노을지는 길에서 주인공들이 함께 자전거를 탈때 나오던 음악을 들으며 행복하게 걸어가던 중에 등 뒤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새로 생긴 정류장 근처에는 꺼져버린 가로등 뿐이었다.

그 흔한 정류장 앞 24시간 편의점도 하나없이, 문닫은 김밥집과 고기집의 천막만이

강한 바람에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필 그날은 나혼자 정류장 앞에 내렸다.

사람이 너무 없고 어두워서 괜히 무서운 느낌이었겠지, 하며 빠른 발걸음으로 언덕길을 올랐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한 곡이 끝나고, 다른 곡으로 전환하는 고요함 중에,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인기척이 강하게 들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면서도 내 빠른 발걸음에 맞추기 위해 다리를 내딛는 듯 했다.

얆은 여름바지가 서로 맞닿아 서걱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아, 뭔가 잘못됐다.' 라는 직감이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더운 여름밤에 검은색 바지와 검은 긴팔 자켓을 입고, 목 끝까지 지퍼를 올린채

검은색 캡모자를 쓰고 고개를 푹 숙인 어느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하필 그날 무슨 멋을 부리겠다고 7cm짜리 높은 힐을 신었을까, 발이 아파 뛸 수가 없는데,

자꾸만 수상한 사람이 가까워졌다.


두려움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얼른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빨리. 내가 이 생에서 달려 본 그 어떤 때 보다도 빠르게 달렸다.

조용히 자켓 양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걸어오던 그 남자도 나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무슨 정신으로 도망쳤을까,

반 전체 중 뒤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겨우 드는 달리기 실력으로 도망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아, 진짜 오산이었다.

아파트 단지로 올라가는 타워형 계단에서 그만, 속도가 줄어 잡혀버렸다.

센서 등도 고장났고, 창문도 없이 콘크리트벽으로 사방이 막혀있어 빛 한줌 들어오지않는 깜깜한 계단이었다.

나를 따라오던 그 검은남자는 내가 입고있던 주홍색 원피스를 찢으려, 엉덩이와 가슴을 만지려들었다.


아, 순간, 무섭다는 감정이 싹 사라졌다.

화가났다. 열이 받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아니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나.' 라고 화가 치솟아오름과 동시에 나도 모르던 힘이 솟아올랐다.

있는 힘껏 발로 차고, 팔꿈치로 내려 찍고, 손에 들고있던 힐로 미친듯이 때리고, 도망쳐

가장 가까이 있던 경비실 안으로 도망쳤다.

머리는 다 헝클어진 채, 맨발로, 다 구겨진 옷차림을 하고 공포에 질린 얼굴의 나를

경비아저씨는 조용히 안에 숨겨주셨다. 그리곤 정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그저 TV소리를 조금 올리셨다.


20분쯤 지났을까, 경비아저씨와 함께 집에 돌아오는 길,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때 내가

무섭게 떨고만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화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때리고 도망칠 용기가 없었더라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그렇게 제압할만한 힘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 끔찍한 결과를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그 이후로 그 검은남자와 비슷한 실루엣만 보여도, 흠칫 놀라 온몸이 긴장해 얼어붙는다.

아주 잠시 스쳐지나간 일이지만, 몇년 정도는 그 길을 걸을때마다 무서워해야했다.

아직도 많은 여성대상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비단 여성에게만은 아니지만)

큰 사건이든, 작은 사건이든, 한 사람의 인생에 너무도 큰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사실이다.

부디,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사건을 앞으로의 세상에 태어나는 여성들이 겪지 않았으면,

그리고 여성들도 힘을 키워 본인의 몸을 지킬 수 있기를,

혹여 피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아픔과 트라우마에서 좀 더 빨리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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