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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빛초록 Nov 23. 2021

시원한 환타가 270원~

90년대 나의 아지트


단지 정문을 지나 쭉 뻗은 언덕길을 올라오면

가지런히 심어진 가로수가 울창한 찻길이 시원하게 나있었다.

그 길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5층 남짓의 빌라형 단지가 있었고,

왼쪽으로는 저마다 마당이 딸린 전원형 주택단지가 있었다.

그 중심엔, 우리 동네에 하나뿐인 옛날 슈퍼가 있었다.


'딸랑~'종소리가 맑게 울려퍼지는 슈퍼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펑퍼짐한 검은 점퍼를 입고서 크고 깊은 눈이 반달눈이 되도록 한가득 웃어주는 주인아저씨가 계셨다.

그 당시에도 꽤나 연세가 많으셨는데도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 오똑한 코를 가진 미남이셨다.

언제나 눈가주름이 자글자글히 지도록 웃으시면서 과자를 사면 땅콩캬라멜 한두개를 손에 꼬옥 쥐어주던 인심좋은 분이었다.

동네에 몇십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이름, 학년까지 줄줄 외우시곤

슈퍼에 올 때 마다 'OO이 왔구나~ 오늘 머리 예쁘게 땋았네~'하고 친절히 반겨주셨다.


아저씨게 인사를 드리고서 진열장 앞쪽의 껌들을 지나면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였던 과자창고가 나타났다.

500원 동전 하나를 손에 꼬옥 쥐고서 손바닥에 땀이 나 동전의 떼가 시커멓게 손에 묻어나올 때 까지

어떤 과자를 사야 맛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과자 하나하나 맛을 떠올려보면서 오늘 내 입은 무슨맛을 원하는지 스스로 묻곤했다.


2~3천원씩 받던 한달 용돈이 다 떨어질 때 쯤이면,

나는 친구들과 100원씩모아 270원짜리 병 환타를 사먹곤했다.

잘록한 콜라병 모양 병 속에 든 오렌지빛 단물은 때로는 3개의 빨대가, 4개의 빨대가 모여들어선

한모금 쪼옥 - 하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얼마나 감질났는지, 수중에 딱 100원만 더 있으면 한모금 더 먹을 수 있을텐데 하고 안타까워선

오렌지 단향이 베어있는 입만 촙촙 다실 뿐이었다.

다 먹고 난 빈병은 슈퍼에 돌려드렸는데, 우리는 그 돈을 모아 연말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모금할 예정이었다.

아주 자랑스럽고 성공적으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이름을 새긴 적도 있지만,

때론 음료수 하나 마음대로 못먹는 우리가 불우이웃이라며 그 돈을 털어 다시 환타를 사먹곤 했다.


그 시절은 음료수 하나 사먹는게 그렇게나 기쁘고 귀했다.

지금은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급진 인테리어가 가득한 카페에 가서

비싼 커피와 디저트까지 한가득 먹을 수 있다니, 갑자기 어른이 된게 실감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음료수 하나 먹기도 힘들어서

여름마다 타는 목으로 컥컥 거리며 친구들과 뛰어다니던 그 시절이 더 행복했던 것 같다.

오늘 밤 꿈에는, 어른이 되어버린 나를 잊고 그 시절의 나로 되돌아가서

작은 슈퍼 앞 플라스틱 벤치에 모여 앉아 친구들과 환타한병을 나눠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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