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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빛초록 Nov 29. 2021

수포자의 길

컨닝의 최후


나는 공대생이다.

그리고 지금도 엔지니어로 재직중이다.

수학, 과학을 기반으로 밥벌이를 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럼에도, 나에게도 수포자이던 시절이 있었으니...


90년대, 내가 살던 지방 동네에는 보습학원이 거의 전무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이라곤 온통 피아노, 수영, 미술, 태권도 같은 예체능 계열 뿐이었다.

쑥쑥 자라는 몸 만큼 머리도 쑥쑥 자라게 하려고

우리동네 부모님들은 가정학습지를 아이들에게 시키기 시작했다.

엄마의 선호마다 눈높이, 구몬, 빨간펜 등 각각 다른 가정학습지 교사선생님들은

온 동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셨다.


우리엄마는 눈높이를 좋아했다.

뚜렷한 이유를 물어본적은 없었지만 나 혼자 생각하기를

왠지 '구몬'은 촌스러운 듯한 이름이고, '빨간펜'은 정말 틀린 문제에 빨간펜을 칠하는

선생님이 오실까봐 왠지 공포스러워서 '눈을 높인다.'같이 좋은 의미인 눈높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고 유추했다.

공부 잘해서 더 높은 곳에 가라고, 높이높이 가라고, 그리고 키도 많이 크라고 엄마가 시켰을 것 같았다.


내가 5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눈높이 선생님을 집으로 불렀다.

내 생에 처음으로 개인교습 선생님 앞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대체 뭘하려는 걸까, 저 선생님은 왜 저렇게 네모난 까만색 가방을 무겁게 들고다니는 걸까? 궁금하던 찰나,

선생님은 아주 얇은 테스트용 문제지와 뾰족하니 잘 깎은 연필 한자루를 내게 건네주었다.

문제지를 받아든 순간, 테스트에 대한 걱정 보다는 처음보는 선생님과 나란히 작은 공부책상에 앉아있는게

너무 불편해서 자꾸만 입이 뾰루퉁 나오려고 했다.

문제지를 열어보니 아주 쉬운 덧셈, 뺄셈 문제들이 있었다.

어릴적에 손가락을 세어가며 배우던 숫자셈이었는데,

겨우 이런 문제로 테스트를 하다니 유치하기 짝이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단숨에 테스트용 문제집에 답을 채워넣었고, 결과는 당연히 100점이었다.

눈이 한껏 동그래진 선생님 앞에서 엄마는 팔짱을 낀 채 어깨를 올리고 우쭐한 미소를 머금었다.

엄마가 기분이 좋아보여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길로 나는 수학영재 소리를 들으며 매일같이 눈높이 수학 선생님과 공부를 했다.


수학이 너무 쉽고 좋았다.

한 문제 문제 빠르게 풀 수 있고, 답도 정해져있으니

빠르게 풀고서 놀이터로 뛰어나갈 수 있는 최고의 과목이었다.

지지부진하게 책을 읽고서 느낀점에 대해 토론하고, 문제마저 길게 읽어야하는 국어따위와 다른,

수학은 우아하고 귀한 귀족의 학문이었다.

선생님이 수업을 길게 하러 왔어도, 이해를 빠르게 하면 그만이었기에 수업시간도 절반으로 맘대로 줄여버렸다.

빨리 듣고 만화영화도 봐야했다.

나도 내가 수학 천재인줄 알았다.


그러던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수학이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곱셈과 나눗셈 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분수에서 한번 미끄러지곤, 방정식에서도 또 한번 미끄러졌다.

어린이 동화책이나 고전소설같은 글 외에 생각하고 탐구해야하는 글을 죽어도 읽기 싫어하던 내게

글로 출제되는 방정식 문제는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진득하니 읽고 수식을 세워야하는데, 이미 진득하게 읽지를 못했다.

숫자로만 이뤄진 문제는 스윽 - 탁 ! 하고 답이 나오는 느낌이었다면

문장으로 나온 문제는 옛날에~ 내가~ 국자랑 엿을 바꿔먹었는데 ~ 그게 ~ 맛이 ~ 그래서~ 같이 호흡이 답답하게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으, 답답하고 오래걸리는데다가 생각까지 해야한다니 최악이었다.

게다가, 수학책만 배우나 싶었는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수학익힘책'이라는게 생겨버렸다.

수학책에서 개념을 배우고나서 수학익힘책에서 연습문제를 푸는 식이었다.

개념책에서는 어느정도 참을성을 발휘해서 문제를 풀만했는데,

풀어도 풀어도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를 던져주는 수학익힘책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스파르타 개인교습 악마선생님 같았다.

수학익힘책 숙제를 피해보려고

책을 읽어버렸다고 해서 숙제를 안해가면 안되나?

책이 물에 젖으면 잉크가 번져서 못알아보지 않을까?

놀이터에서 놀다가 책이 그만 찢어져서 새로 사야된다고 말하면 몇번은 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고심하던 끝에,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전과 베끼기' 일명 '컨닝'이었다.


90년대에는 모든 교과서 답이 수록되어있는 전과가 집집마다 있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고3때 과목별로 묶여진 두꺼운 사전같은 문제집처럼 생겼던 것 같다.

엄청나게 두꺼워서, 학교에는 가져가서 베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려고 방에 들어가서는

아주 조용조용히 쿵쾅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엄청난 속도로 답을 옮겨적어야했다.

마지막 양심을 지켜, 딱! 수학익힘책 답과, 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회과부도 연습문제만 베끼기로 결정했다.

다른 과목들은 직접 풀었으니 이정도면 아예 공부를 헛한건 아니라고 혼자 합리화했다.

혹여나 엄마가 간식을 가져다주러 똑똑똑~ 노크를 하고 방문을 활짝 열지는 않을까,

책상에 앉아서는 등 뒤의 인기척을 느끼기위해 온 몸의 감각을 뾰족히 세웠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전과를 베끼고 나면 100m 달리기를 전속력으로 한 듯이 심장이 뛰고 땀이 뽈뽈 났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들키지 않고 2주정도 컨닝에 성공했을까,


그날이 오고 말았다.


유독 숙제가 많은 날이었고, 2주정도의 은밀한 작업에 익숙해져 긴장감이 떨어져있던 날이었다.

집중해서 빨리 끝내고 놀아야지! 했던게 문제였다.

온 집중력을 다해 전과의 답안을 교과서에 옮겨 적느라, 등 뒤에서 방 문이 열리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우리딸 먹으라고 우유와 사과를 정성스레 준비해 예쁜 쟁반에 받쳐들고 온 엄마는

펼쳐져 있는 전과를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너 ! 나와 !"

로 시작해서 엄마는,

엄마와 아빠가 너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돈을 벌었느니, 네 학습지 비용이 한달에 얼마나 나가는지 아니,

전과는 또 얼마인지 아니, 공부 열심히하라고 사줬지 누가 베끼라고 사줬니,

수학은 연습을 해야 내것이 되는건데 개념 안다고 베끼면 실력이 느는줄 아니,

그러다가 시험을 망치고 창피를 당하면 얼마나 부끄럽니, 등등 온갖 말로 혼쭐을 냈다.

"전과는 압수야!!!!"

아...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이제 수학 숙제를 베끼지 못한다니.. 절망감 때문에 엄마가 아무리 무섭게 혼을 내도 무섭지도 않고,

그저 넋이 나가 있었다.

이제 수학을 직접 풀어야한다니....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몇단원을 베껴서일까, 그다음 숙제를 풀어보려는데 도무지 알쏭달쏭 식도 세울수가 없었다.

결국에 뒤떨어진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두배 세배로 노력해야했으니,

그렇게 수포자의 길은 엄마의 전과 압수로 강제 종료되고 말았다.


그 시절 들키지 않았다면 진로가 크게 바뀌었을까?

나는 그대로 수학을 포기한 아이로, 어른으로 자랐을까? 하고싶은 일을 맘대로 했을까?

궁금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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