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버트런드 러셀과 프레드릭 코플스톤의 철학 논쟁 -(4)

1948년 벌어진 두 지식인의 토론 번역 및 분석

by 신영

논리적 평가 및 비판적 분석

버트런드 러셀과 프레드릭 코플스톤의 이 역사적인 논쟁은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고전적 형이상학의 입장과 현대 분석철학적 회의론의 대립을 잘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예리한 논변을 펼쳤지만, 각자의 전제와 철학적 방법론 차이가 크기 때문에 토론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끝났다. 아래에서는 이 논쟁의 주요 논증들에 대한 논리적 평가와 비판을 살펴본다.


1) 우주론적 논증에 대한 평가: 충분한 이유 vs 우주의 브루트 팩트

코플스톤이 제시한 우주론적 논증(특히 우연성에 근거한 논증)은 고대부터 내려온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을 현대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그는 라이프니츠의 충분한 이유 원리(PSR) – 어떤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 를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우주의 존재에도 반드시 어떤 이유나 근거가 있어야 하며, 그것이 자기 원인일 수는 없으니 (왜냐하면 우주는 우연적 사물들의 총합이므로), 외부의 필연적 존재(신)를 상정해야 설명이 닫힌다는 것이다. 논증 구조는 우연적 존재에서 필연적 존재로 진행되며, 무한 회귀는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통찰을 핵심 전제로 삼는다.


이에 대한 러셀의 반론은 원리 자체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요약된다. 러셀은 충분한 이유의 원리(PSR)를 받아들이지 않고, 존재에 근거가 꼭 있어야 한다는 직관을 의문에 부친다. 그는 우주 자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존재할 수 있다고 보며, 이를 거부할 논리적 모순은 없다고 생각한다. 무한 회귀에 대해서도, 코플스톤은 무한 연쇄로는 왜에 답이 안 된다는 입장이지만, 러셀은 설명 없이 받아들이고 끝낼 수도 있다는 식으로 사실상 무한 후퇴를 용인하거나 질문 자체를 기각한다.


이 쟁점은 철학사에서 늘 논란이었다. 데이비드 흄 같은 경험론자도 굳이 전체에 원인을 요구하지 말라는 취지로 러셀과 비슷한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흄은 원인은 습관적 관념이며, 우주의 원인을 따지는 것은 우리의 경험 범위를 넘은 추론이라고 보았다. 칸트 역시 인과법칙은 현상세계에만 적용되며, 세계 전체에 왜라고 묻는 것은 형이상학적 넘겨짚기라고 비판했다. 러셀의 생각은 이러한 경험론적, 칸트적 회의 전통과 맥락을 같이 한다.


코플스톤의 논증에 대한 논리적 검토를 해보면, 몇 가지 약점과 강점을 지적할 수 있다.


전제 설득력 문제

코플스톤은 설명이 없으면 이해 불가능이라는 형이상학적 직관을 전제한다. 그러나 충분한 이유의 원리 자체는 논쟁적이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에게는 코플스톤의 논증이 설득력을 잃는다. 실제로 러셀은 PSR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논증의 핵심을 빗겨나갔다. PSR을 증명할 방법은 없고 이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신념이라, 이 견해 차이를 좁히기가 어렵다. 코플스톤이 PSR을 옹호하며 제시한 과학 탐구의 유비(analogy) – 과학자도 자연 현상의 원인을 찾듯 철학자도 우주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 – 는 흥미롭지만, 러셀의 말대로 찾는 시도와 존재를 가정은 다르다는 반론이 성립한다. 과학자는 원인을 찾다가 없으면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지만, 코플스톤은 애초에 반드시 있다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PSR을 믿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되고, 이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거나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명제는 아니다.


우주 개념과 논리적 범주

러셀은 우주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삼았다. 그는 우주(총체)를 집합적 편의어로 보고, 그것을 개별 사물처럼 다루는 질문(우주의 원인)을 부인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겐 어머니가 있다 vs 인류 전체의 어머니라는 예로 부분과 전체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지적했는데, 이는 우주론적 논증 일반에 제기되는 전통적인 반론이다. 코플스톤은 이 비판을 피하려고 우주의 원인은 우주와 별개의 범주(초월적 존재)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각 부분에 설명이 있으니 전체에도 설명이 있다는 조합논증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는 평도 있다. 그럼에도, 러셀의 비유가 꼭 들어맞는지는 논란이다. 코플스톤은 원인 없음=필연적 존재라는 논리로 인류 어머니의 오류를 회피하려 했는데, 이를 두고 철학자들은 의견이 갈린다. 즉, 우주의 존재를 설명하는 초월적 원인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여전히 가정이며, 러셀은 그 가정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무한 후퇴와 궁극 원인

코플스톤의 주장은 무한 원인 회귀(infinite regress)의 직관적 문제점을 지적한 점에서 힘이 있다. 현대 논리에서는 무한 후퇴 자체가 모순은 아니지만, 설명 역할을 못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A가 B 때문에, B가 C 때문에, ... 끝없이 가면, 왜 이 연쇄 전체가 존재하느냐는 물음은 남는다. 코플스톤은 이를 부정확한 비유로 초콜릿을 무한히 더해도 양이 되지 않는다고 표현했는데, 즉 우연적인 것들의 집합을 아무리 늘려도 우연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논리다. 이것은 논증이라기보다 통찰에 가까운데, 메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호소력이 약하다. 러셀은 부분에 원인 있으면 충분, 전체엔 필요 없음으로 대응했고, 무한 회귀를 본인이 받아들이는 데에 따른 세계관의 미결점(Why is there something에 답 없음)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논리적으로 이 부분은 입장 차이지, 한쪽이 함정에 빠졌다기보다는 철학적 선호의 차이다. 논리의 완결성을 중시하는 쪽은 코플스톤 편에 설 것이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질문을 무의미시하는 쪽은 러셀에 공감할 것이다.


존재론적 논증과의 연관

흥미롭게도, 대화 도중 러셀이 코플스톤의 논증을 본질에 존재를 포함시켜 존재를 증명한다는 존재론적 논증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러셀이 필연적 존재 개념을 존재론적 논증의 다른 표현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코플스톤은 자신은 어디까지나 경험론적 우주론적 증명을 하고 있다고 선을 그었지만, 결국 필연적 존재 개념은 그 존재의 본질과 존재가 동일함(토마스 아퀴나스나 Spinoza식 개념)이라는 점에서 존재론적 논증의 뉘앙스를 가진다. 러셀은 존재는 술어가 아니다(Existence is not a predicate)라는 칸트 이래의 존재론적 논증 비판 논리를 들이대며, 신 존재를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처럼 다루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코플스톤이 우린 신의 본질을 a priori 알 수 없다 하고 피해갔지만, 러셀의 이 비판은 우주론적 논증이 결국 존재론적 주장(필연적 존재의 전제)을 슬며시 끼워넣는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통찰이다. 이는 코플스톤 논증의 순환 위험을 지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필연적 존재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필연적 존재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는 게 아닌가 하는 점.)


한편 러셀의 입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될 수 있다.


설명 요구의 임의적 중단

러셀은 우주는 그냥 존재한다. 그게 다다라고 말하며 의문을 끝내려 했다. 이 태도는 흔히 브루트 팩트(brute fact)론으로 불린다. 어떤 사태를 추가 설명 없이 기본 사실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모순은 없지만, 지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는 태도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과학적 태도에서는 어떤 현상도 이유를 찾기 전까지 그냥 그렇다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우주의 존재라는 최대의 수수께끼를 두고 그냥 있다고 해버리는 것은, 인간 이성의 궁극 왜 질문을 차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코플스톤이 이를 질문 자체를 못하게 하는 독단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다. 러셀의 입장은 형이상학적 탐구를 지나치게 협소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러셀은 이를 경험 범위 밖에 대한 부당한 질문으로 본 것이고, 이는 논리실증주의 등 당대 사조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우주 개념의 의미

러셀이 우주라는 말 자체가 별 의미 없다고 한 부분도 논쟁 소지가 있다. 우주(세계)라는 개념은 분명 추상적 집합 개념이지만, 아무 의미 없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코플스톤이 지적했듯, 무의미한 단어라면 편리하게도 못 쓰일 것이다. 러셀은 the, than 같은 기능어에 비유했지만, 우주는 그래도 실체 개념이지 문법적 기능어는 아니다. 결국 러셀도 우주는 그냥 있다고 말할 때는 우주를 주어로 취급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우주에 대해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직관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왜 이 전체 연쇄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얼핏 막연해 보여도, 모든 문화와 철학에서 제기되어 온 근본 질문이다.


러셀이 그것을 의미없다고 할 때, 그 판단 기준이 완전히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러셀은 논증 도중 내 기계에 안 들어오면 무의미라 하는 건 독단이라는 코플스톤의 지적을 일부 수용했는지, 몇몇 형이상학 용어가 이해 안 갈 뿐이라고 톤을 낮추기도 했다.) 종합하면, 러셀의 태도는 반증가능성이나 타당성보다는 본인의 철학적 취향에 기댄 측면이 있다. 형이상학적 질문을 무의미라고 선언하는 것도 일종의 형이상학적 입장이지, 완전히 중립적이지는 않다. 코플스톤은 이를 잘 지적하며 부분 철학을 전체 철학으로 삼는다고 비판했는데, 러셀은 그 부분은 깊게 반론하지 않았다.


세계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대답

'우주는 그냥 있어'라는 러셀의 대답은 철학적으로 설명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멈춘 것이다. 이는 하나의 입장이지만, 왜 우주가 그런 브루트 팩트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러셀이 딩글 교수 예를 들어 과학자도 어떤 건 설명 못한다고 했지만, 과학자는 설명 못하면 모른다고 할 뿐 아무 이유 없이 그렇다로 종결짓지는 않는다. 러셀은 이유 없다를 이미 결론처럼 말하고 있어, 사실상 무근거한 단언을 한 셈이다. 코플스톤이 그건 논리분석으로 얻어진 답이 아니라고 한 것은 이 부분을 찌른 것이다.


실제로 우주는 설명 불가능이라는 명제 자체는 논리나 과학으로 입증된 게 아니라 러셀 개인의 철학적 신념이다. 따라서 코플스톤이 PSR을 가정한 것이나 러셀이 우주 브루트팩트를 가정한 것이나, 모두 입증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선택인 면이 있다. 논리적 엄밀성만 놓고 보면, 두 입장 다 자기 전제를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원리주의(독단)에 빠질 수 있다. PSR을 절대시하면 꼭 설명이 있어야 해라는 형이상학적 독단이고, 러셀처럼 설명 없다로 못 박는 것도 역방향 독단일 수 있다는 점에서, 논쟁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우주론적 논증 부분에선 코플스톤이 질문을 제기하는 힘이 있었고, 러셀이 그 정당성을 의심하면서 문제를 해체했다고 볼 수 있다. 논증의 승패를 가리기보다는, 양측이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화한 것으로 보인다. 코플스톤 쪽의 핵심 쟁점인 무엇인가 대신 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가라는 존재 물음은 여전히 철학에서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러셀류의 대답(그냥 그렇다)은 설명부재를 받아들이는 태도일 뿐, 해답이라 하긴 어렵다. 반면 코플스톤식 답(신이 있어서 그렇다)은 설명욕구를 충족시키지만, 그 전제(신의 존재)를 별도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담이 있다.


결국 형이상학적 원리 신봉 대 경험적 회의의 충돌이며, 논리적 타당성 평가는 각자의 메타철학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토론이 가치 있는 점은, 양쪽 입장의 최대치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논쟁 이후에도 유신론자들은 우주론적 논증을 다듬어 전개했고 (칼럼 우주론 등), 무신론자들은 우주의 존재를 어쩔 수 없는 사실로 보는 입장을 계속 취하며 평행선을 이어가고 있다.


2) 도덕적, 종교적 경험 논증에 대한 평가

토론의 두 번째 부분은 형이상학적 논증보다 덜 공식적이지만 인간 경험에 기반한 논증을 다뤘다. 코플스톤은 인간의 도덕적 의식과 신비 체험을 언급하며, 신이 존재해야만 이 경험들이 온전히 설명된다는 주장을 내비쳤다. 여기에는 칸트식 도덕논증이나 윌리엄 제임스식 종교경험의 호소가 섞여 있다. 그의 취지는 신이 없다면 선과 악의 절대기준이 없고, 또한 신비 체험에서 만난 절대적 대상으로 무엇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다.


러셀의 대응은 신 없이도 도덕 개념을 지지할 수 있고, 종교체험은 주관적 현상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G.E. 무어를 예로 들며 객관적 도덕가치가 꼭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했고, 종교적 체험은 환각이나 착각과 구분하기 어렵고 공유 불가능하므로 객관적 실재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종교적 믿음이 낳는 긍정적 효과(성인들의 선행)가 그 믿음의 진리를 담보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을 논리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도덕의 기반 논쟁

신이 없으면 절대선도 없다는 코플스톤의 암시와, 러셀의 선악은 신 없이도 개념적으로 가능이라는 입장은 도덕철학의 오랜 논점이다. 유신론적 도덕 객관주의 대 세속적 도덕 객관주의(또는 상대주의)의 대립이다. 러셀은 무어를 인용했지만, 무어는 선은 규정할 수 없는 단순한 속성이라고 했지, 필연적으로 객관 도덕실재론자도 아니었다. 러셀이 말하려던 요지는 선악 개념 자체에 신 개념이 논리적으로 포함되진 않는다는 정도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윤리학자들이 신 없이도 객관적 가치의 존재를 옹호한다 (인본주의적 객관주의, 칸트의 실천이성 등). 반면 신학자나 일부 철학자들은 도덕법칙의 궁극 근거를 신으로 둬야 절대성이 확보된다고 주장한다. 이 논쟁도 완결되기 어려운 가치 메타윤리 문제다. 코플스톤이 러셀에게 선악을 어떻게 구별하냐 묻고, 러셀이 답하진 않았지만 (대신 무어를 들었지만) 아마 러셀 본인은 쾌고감정이나 이성적 숙고로 선악을 판단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깊이 다뤄지지 않았지만, 코플스톤이 처음 문제 제기했다 접은 목적이 없어진다는 주장도 실존주의 논쟁과 연결된다. 러셀은 인류가 스스로 목적 정하면 된다고 보는 입장이었고, 코플스톤은 그것이 권력자의 횡포로 흐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부분은 본 토론에서는 짧게 지나갔지만, 함축은 크다.


신 없이도 의미와 도덕을 성립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현재까지도 철학과 신학에서 견해차가 남아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신이 없으면 선도 없다라는 주장 자체는 입증이 어렵고 순환 논리가 될 수 있다. 선의 개념 정의에 신을 넣어버리면 당연히 그러하나, 그 정의를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별도 문제다. 따라서 이 지점 역시 양측 전제 차이로 귀결된다. 러셀 입장에서, 신 없이도 선악 개념 성립은 가능하며, 이를 명시적으로 논증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분위기를 고려하면 자연주의 윤리설이나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코플스톤은 그리 상세히 파고들지 않고 형이상학 논증으로 넘어갔다.


종교적 경험의 논증력

코플스톤은 종교적 신비 체험을 엄밀한 증명은 아니지만 신이 있다는 추론에 힘을 실어주는 간접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종교 체험은 철학적 논증에서는 약한 증거로 취급되는 편이다. 왜냐하면 주관적이고, 다양한 종교에서 서로 상충하는 체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러셀이 지적한 악마 경험의 예는 극단적이지만 일리 있다. 힌두교 신비가, 기독교 신비가, 무속인, 심지어 약물복용자까지 각자 다른 절대적 경험을 말한다. 이것을 다 같은 하나의 신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모두 객관적 실재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코플스톤이 정상적인 케이스(성자들의 경우)만 추려 삶의 열매가 좋으면 체험도 진실할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지만, 러셀은 착각도 선한 삶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논리적으로 러셀의 말이 맞다. 긍정적 효과에서 믿음의 진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논리적 오류(결과 좋음의 역으로 원인 참이라고 보는 오류)에 해당한다. 코플스톤도 이 점을 잘 알아 믿음의 일부만 진리일 개연성이라 물러섰지만, 러셀은 거기서도 여전히 증거는 부족이라고 잘 지적했다. 실제 역사상 허구의 믿음이 사람에게 긍정적 영향을 준 사례는 많다. (예: 산타클로스 믿음이 어린이를 선행하게 한다고 산타의 실존이 입증되진 않는다.)


신비 체험의 객관성 문제

코플스톤은 어떤 순수한 가치나 존재와의 합일 경험을 묘사하면서, 그것은 단순 정신병적 환각과 다르다고 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그런 신비적 몰입 경험은 뇌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러셀은 이에 대한 학술적 설명을 깊이 하진 않았지만, 혼자만 보는 것은 신기루일 수 있다는 상식을 강조했다. 오늘날 뇌과학이나 심리학은 신비 체험을 유발하는 신경학적 메커니즘도 연구하고 있다. 물론 뇌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예: 뇌 속 시각피질 활동으로 사과를 봐도 사과는 있다), 문제는 그 대상이 다양하게 보고된다는 것이다.


신비가는 각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른 대상을 경험한다. 코플스톤은 공통점을 찾으려 했지만, 플로티노스의 일자, 인도의 브람만, 기독교의 하느님은 개념이 다르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것을 초월적 실재는 하나인데 사람들이 다르게 해석한다고도 주장하지만, 그걸 입증할 길은 없다. 따라서 논증으로 삼기엔 부적절하다. 코플스톤도 증명은 아니다라고 인정한 부분이다.


러셀의 환원주의 한계

한편, 러셀의 태도도 모든 것을 환상 취급하는 과도한 회의주의로 비칠 수 있다. 종교적 체험을 배제하면, 인간이 보고 느끼는 가치, 목적, 성스러움 등의 차원은 설명에서 소외될 위험이 있다. 러셀은 무어를 인용했지만, 본인은 이성주의적 인도주의자로서 인간이 부여한 의미 속에서 살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경험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며, 그것을 전부 착각 혹은 개인 심리 현상으로 돌리는 것은 실존적으로 냉소적으로 들릴 수 있다. 논리의 측면에서는 러셀이 옳더라도, 인간의 주관적 확신과 체험의 파워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러셀은 실제 개인으로서 매우 도덕적 인도주의자였지만, 그의 철학은 가치나 의미의 객관 기반을 제공하진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본 토론에서는 그가 이 부분을 깊이 논증하진 않았지만, 그의 다른 에세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등을 보면 기독교 신앙의 심리적 기원은 두려움이라고 해석하는 등 종교를 폄하하기도 한다. 코플스톤 같은 철학자에게는 이런 태도가 인간 경험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정리하면, 도덕, 종교 논증 부분에서도 양측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논리적으로는 러셀이 우위를 보이는 듯하다. 왜냐하면 코플스톤이 제기한 도덕·종교 경험의 설명 필요성은 반드시 신을 요구하지는 않으며, 러셀의 대안(세속적 도덕, 주관경험의 한계)도 완전히 반박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좋은 효과 ≠ 진리라는 러셀의 지적은 핵심을 찌른다. 실제 사실과 무관하게 믿음이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은 심리적으로 명백하며, 이는 실용주의의 함정으로도 알려져 있다. 코플스톤은 믿음 전체가 아니라 긍정적 부분의 진리만 얘기했다고 했지만, 여전히 믿음이 낳은 삶의 변화가 그 믿음의 참·거짓을 결정해주진 않는다. 그것은 별개의 판단 영역이다 (진리는 사실에, 선함은 효과에 관계).


한편, 러셀의 입장도 완전히 문제 없는 건 아니다. 그가 선악 문제에서 구체적 대답을 피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무어의 이론이라고 했지만, 무어의 주장을 어떻게 러셀이 받아들였는지, 혹은 러셀 자신의 도덕 철학은 무엇인지 명확히 나오지 않았다. 만약 선악은 객관 개념이지만 신과 무관이라거나, 아니면 선악은 인간의 주관적 선호·사회적 산물이라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러셀은 확답은 피했다. (실제로 러셀은 공리주의적 경향과 감정적 기반을 결합한 도덕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코플스톤이 나중에 다루자고 넘어갔지만 정작 깊게 안 다뤄진 것이다. 논리적으로 도덕 객관성을 신 없이 세우는 문제는 철학적으로 난제다 (이른바 윤리적 자연주의의 어려움). 러셀은 무어를 대며 빠져나갔지만, 사실 무어의 입장(객관적이지만 정의 불가)은 신 플러스 알파가 필요 없다는 말은 되어도, 그 선이 왜 성립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메타윤리 토론을 했다면 흥미로웠겠지만 시간상 생략된 것이다.


또한 종교 경험 부분에서 러셀은 매우 회의적이었는데, 이는 그의 시대 분위기와 맞닿는다. 그러나 오늘날 철학자들 중에는 그런 신비경험을 다룬 이들도 있고, 최소한 그것이 가진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려는 흐름도 있다. 러셀은 선을 그어버렸지만, 그 단호함이 열린 탐구의 자세인가 하는 논점도 있을 수 있다.


3) 종합적인 비판과 토론 의의

이 논쟁에서 두 철학자는 각자의 철학적 토양이 매우 달랐다. 코플스톤은 토미즘(아퀴나스적 전통)과 라이프니츠적 형이상학에 서 있었고, 러셀은 경험론과 논리실증주의 사이 어딘가 (완전 실증주의자는 아니나 그 영향을 받은) 있었다. 그래서 전제가 일치하지 않아 평행선을 달린 면이 크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서로의 약점을 찌른 부분도 분명 존재하며 아래와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코플스톤 논증의 문제점

코플스톤은 큰 그림의 설득력은 있으나 세부 논증에서 가정이 많다는 약점이 있다.


(a) 충분한 이유의 원리를 공리처럼 썼는데 이것이 보편 타당한지 의문이다.


(b) 우주 전체는 자기원인이면 필연적 존재라는 논증에서 전체 = 부분의 합이라는 전제가 숨어 있다. 러셀의 지적대로 부분은 우연적이지만 전체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여지도 사실 열려 있다. 코플스톤은 전체가 부분 외에 실체가 없으니 부분이 우연적이면 전체도 우연적이라고 말했지만, 논리적으로 각 부분이 우연적 + 무한 시리즈 = 전체는 우연적이 되는가도 확실치 않다. 무한 집합의 성질이 개별 원소의 성질과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플스톤은 무한히 더해도 우연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경험이 아닌 직관이다.)


(c) 필연적 존재에 속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도, 본질=존재, 완전선, 인격성 등 여러 추가 가정이 필요하지만 논쟁에서는 거기까지 못 갔다. 만약 토론이 계속되어 그 필연적 존재가 인격적 하나님인가로 나아갔다면, 또 다른 논점들이 제기될 것이다. 코플스톤은 일단 러셀에게 신 존재 자체를 인정받는 데 실패했으므로 거기 못 갔지만, 우주론적 논증이 신 개념의 인격성이나 도덕성을 바로 보장하지도 않는다. (코플스톤도 만약 러셀이 필연적 존재를 인정했으면, 그 다음 신의 속성 논의로 갔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따라서 그의 형이상학적 논증은 일단 러셀같은 회의론자에겐 먹히지 않았고, 설득 대상은 주로 선험적으로 메타물음을 인정하는 청중이 된다.


러셀 논증의 문제점

러셀은 논증이라기보다 반증과 의문 제기 역할을 했는데, 일부 반론은 논점회피 또는 과도한 의미축소로 비칠 수 있다.


(a) 필연적·우연적 용어를 몰이해하겠다는 식으로 나온 것은 일종의 언어철학적 발뺌처럼 보였다. 코플스톤이 이해는 하면서 안 된다고 하는 것 아니냐 하니, 러셀이 의미를 모르겠다고 한 부분이 그거다. 물론 러셀은 진지하게 논의하다가도 불리하면 그런 건 의미 없다고 치워버리는 느낌이 있다. 이는 실증주의 언어관 (논리적으로 검증 안 되는 말은 무의미)과 연결되지만, 코플스톤 말대로 그 자체가 철학적 입장이기에 논쟁 해결은 아니었다.


(b) 우주는 그냥 있다는 러셀의 결론은, 지적 겸허로 볼 수도 있지만, 철학적 설명으로는 빈약하다. 논리적으로 모순을 일으키진 않지만, 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근거가 부실하다. 이는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입장의 한계라 하겠다.


(c) 러셀은 반론을 주로 전개하여 자기 입장의 긍정 논증은 없는 상태다. 즉, 신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게 아니라 신 있다는 증명을 난 안 받아 하는 태도였다. 실제로 그는 토론에서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코플스톤은 증명 시도, 러셀은 논파 시도였기에, 애초에 대칭적인 논쟁이 아니었다. 이 경우 보통 증명 시도가 완벽히 성공하지 못하면, 논파 측이 우세한 듯 보이는 효과가 있다. 러셀은 논리적으로 허술한 곳을 찌르며 코플스톤을 곤란하게 했지만, 엄밀히 말해 러셀이 자신의 주장(신 모르겠다)을 참이라고 입증한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상대의 논증을 충분히 납득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소극적 승리는 회의론자의 일반적 위치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지반을 지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코플스톤은 끝까지 그래도 설명 없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했고, 러셀은 내가 납득 못할 철학적 전제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논리적으로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세계관 차이만 부각된 셈이다.


이 토론의 철학사적 의의는 20세기 중반의 유신론-무신론 논쟁의 수준을 잘 보여줬다는 것이다. 코플스톤과 러셀의 대화는 이후 여러 선집에 실렸고, 후대 철학자들이 해당 논변들을 발전시키거나 비판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예컨대, 현대 철학자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등은 우주론적 논증(특히 칼람 형태)을 부활시켜 논의했고, 그레이엄 오피 같은 철학자는 러셀의 관점을 잇는 무신론 논변을 전개했다. 또한 실존주의(사르트르 언급)나 윤리학(객관주의 vs 상대주의) 등도 이 논쟁과 관련되어 논의되었다.


1948년의 러셀-코플스톤 논쟁은 한쪽이 이겼다기보다 서로의 관점을 분명히 드러낸 토론으로 볼 수 있다. 신 존재 증명이라는 난제를 놓고, 형이상학적 설명 요구와 경험논리적 엄격성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 것이다. 코플스톤의 주장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모색한 전통을 옹호한 것이며, 러셀의 주장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불가지론적 입장을 합리적으로 변호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양측 모두 약간의 허점을 노출했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 속에서 수준 높은 토론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자주 회자된다. 이 논쟁을 통해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절대적 가치는 있는가, 개인적 종교 체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의 심오한 문제들을 성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평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론적 논증은 전제(충분한 이유 원리)에 대한 합의 없이는 강제력이 없고, 러셀의 반론(우주는 브루트 팩트)은 설명 부재의 여운을 남긴다. 신비,도덕 경험 논증은 직접 증명이 되기 어려우며, 러셀의 회의론은 그 경험들의 가치 차원을 충분히 해명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두 입장 모두 철저히 검토하면 각각 설득력을 가지는 부분과 한계를 드러내며, 신 존재 문제는 단순한 논증 몇 개로 결론낼 수 없는 복합적인 철학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러셀과 코플스톤의 대화는, 상반된 철학 전통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믿음 체계와 논리의 기반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끝)



전체 토론 영상 링크 (영어)

https://youtu.be/wMsbD1L5IlQ?si=9UszR1WkZRFYu5Ne


토론의 개요와 앞선 내용

1편 링크 - https://brunch.co.kr/@sypark1124/60

2편 링크 - https://brunch.co.kr/@sypark1124/61

3편 링크 - https://brunch.co.kr/@sypark1124/62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버트런드 러셀과 프레드릭 코플스톤의 철학 논쟁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