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의 역설
어떤 철학적 질문은 답을 찾는 순간 그 질문 자체가 변질된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서 제기되는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바로 그렇다. 이 질문은 단순히 교육학적 관심사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들—앎과 삶, 이론과 실천, 보편과 개별—에 대한 심층적 탐구로 우리를 이끈다.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르침 자체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대화편 초반에 등장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열정은 이 문제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그는 프로타고라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가 무엇을 배우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날카로운 질문들—프로타고라스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것을 배우면 어떤 사람이 되는가—은 단순한 정보 전달과 진정한 교육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부각시킨다.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이 좋은 시민이 되는 법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미 문제가 시작된다. 좋은 시민됨이란 과연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인가? 프로타고라스가 들려주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제우스가 모든 인간에게 정의감과 수치심을 분배했다는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덕이 만인에게 주어진 가능성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신화라는 서사 형식 자체가 이미 문제적이다. 합리적 논증을 추구하는 철학적 맥락에서 왜 프로타고라스는 신화에 의존하는가? 이는 단순한 수사적 기교가 아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정치적 덕의 기원이 합리적 연역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론적 차원에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덕의 가르침 가능성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덕 자체가 인간에게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상기설이 배경으로 작동한다. 모든 학습은 사실 상기이다. 영혼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몸에 갇히면서 그 앎을 잊었다. 교육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다. 이는 교육에 대한 혁명적 관점을 제시한다. 교사는 학생에게 무엇인가를 넣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학생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존재다. 하지만 상기설도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만약 우리가 이미 모든 것을 안다면, 왜 어떤 사람은 덕스럽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가? 왜 어떤 사람은 쉽게 상기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가? 개인차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은 덕의 가르침 가능성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해결되어야 할 선결 문제들이다.
소크라테스의 덕은 지식이다라는 명제는 서구 윤리학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주장 중 하나다. 이 명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도덕적 행위는 올바른 정보를 소유하는 문제로 환원된다. 하지만 이는 일상적 경험과 명백히 배치된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서 플라톤 철학의 독특함이 드러난다. 소크라테스에게 진정한 지식은 단순한 명제적 지식이 아니라 존재적 지식이다. 선에 대한 지식은 선 자체와의 존재론적 일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선을 안다는 것은 곧 선한 존재가 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맥락에서 아무도 자발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소크라테스의 역설적 주장이 이해된다. 악행은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무지 그 자체다. 진정으로 선을 아는 자는 선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고, 악하게 행동하는 자는 아직 선을 모르는 자다. 이는 결정론적 윤리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유의 가장 근본적 형태를 제시한다. 진정한 자유는 임의적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다.
하지만 이런 해석도 덕의 전수 가능성이라는 원래 문제로 돌아오면 새로운 역설을 낳는다. 만약 덕이 지식이고 지식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덕스러운 사람들은 자신의 덕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지 못하는가? 소크라테스가 페리클레스의 사례를 들어 프로타고라스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등장한다. 진정한 지식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각성되는 것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 안에 이미 있는 지식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는 앎의 역설을 낳는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지식이 아니고, 진정한 지식은 가르칠 수 없다. 그렇다면 교육은 불가능한가? 오히려 반대다. 교육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자기 각성의 조건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난다.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최종적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독자들은 이를 플라톤의 한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른다. 성급한 확신을 경계하고, 복잡함을 단순화하려는 유혹을 거부하며, 모든 답 속에서 새로운 질문을 발견하는 법. 그것이야말로 철학적 삶의 핵심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이미 그 답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질문을 통해 사유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덕의 전수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