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개인들을 위한 고대의 지혜
에피쿠로스만큼 억울한 철학자도 드물다. 그의 이름을 딴 '에피큐리언'은 미식가나 쾌락주의자의 대명사가 되었고, 기독교 교부들은 그를 악마의 대변인으로 매도했다. 하지만 정작 에피쿠로스 본인은 어땠을까? 그는 아테네 외곽의 정원에서 물과 보리빵으로 연명하며 제자들과 철학을 논했다. 노예와 자유민,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는 파격적인 공동체를 운영했고, 30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이 책에는 현존하는 그의 저작인 3편의 편지, 유언장, 금언, 기타 단편까지 총 8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욕을 먹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로 백성을 통제하던 기득권층에게,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으며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철학자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이 책은 그동안 왜곡되고 오해받은 한 철학자의 진짜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에피쿠로스가 태어난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철학도 이해할 수 없다. 기원전 4-3세기 헬레니즘 시대는 그야말로 격변의 연속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이 끝나고 제국은 후계자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대표되던 폴리스 시대는 막을 내렸고, 개인은 거대한 마케도니아 왕국이나 셀레우코스 제국의 신민으로 전락했다.
상황은 이랬다. 어제까지 아테네 시민으로서 아고라에서 정치를 논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케도니아 왕의 신하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는 힘을 잃었고,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가치체계는 무너졌다. 당시를 살던 개인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들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에피쿠로스 철학이 탄생했다. 그의 철학은 플라톤처럼 이데아의 세계를 탐구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만물의 원리를 체계화하려는 거창한 시도가 아니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이 불안하고 혼란한 세상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절실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철학이 상아탑의 사변이 아니라 삶의 실용적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이론적 토대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다. 잠깐,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기원전 3세기에 원자의 존재를 상정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지 않은가? 현미경은커녕 제대로 된 확대경도 없던 시대에, 순수한 논리적 추론만으로 물질의 최소 단위를 설정한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가 처음 제시한 아이디어를 에피쿠로스가 받아들인 과정을 상상해 보자. 무한히 작게 나눌 수 있다면 결국 '나눌 수 없는 것'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고 실험말이다. 이 원자들이 공허한 공간에서 움직이며 결합과 분리를 반복한다는 가설. 2000년 후 원자론이나 현대 입자물리학의 기본 아이디어가 이미 여기에 다 들어있다.
물론 에피쿠로스는 단순히 데모크리토스를 베낀 것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원자의 자발적 편향'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에 의해 결정되지만, 에피쿠로스는 원자가 때때로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기울어진다고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천재적 직관이다. 완전한 결정론의 세계에서는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물리학 법칙 자체에 '불확정성'을 도입한 것이다.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치밀함이 드러난다. 그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가져올 수 있는 숙명론적 절망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고, 따라서 행복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겨둔 셈이다. 에피쿠로스는 실험 도구 없이 순수 사변만으로 놀라운 물리학적 직관에 도달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단순한 철학 학교가 아니었다. 노예와 자유민, 남자와 여자, 그리스인과 이방인이 구분 없이 어울리는 공동체였다. 이는 당시 사회 통념으로는 충격적인 실험이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이 엘리트 남성들만의 공간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정원의 규칙은 간단했다. 정치에 참여하지 말고, 결혼하지 말며, 자녀를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아타락시아, 즉 마음의 평온을 해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에피쿠로스 철학의 한계가 드러난다. 정치적 참여의 포기는 곧 사회적 책임의 방기를 의미했다. 개인의 평온을 위해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태도가 기득권층에게는 오히려 편리했다는 점이다. 백성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개인의 소소한 행복에만 매몰된다면, 통치자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로마 제국이 에피쿠로스 철학을 굳이 탄압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가장 오해받는 부분이 바로 '쾌락' 개념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쾌락은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을 연상시키고 다소 부정적 뉘앙스마저 풍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전혀 다르다. 모든 고통이 제거된 상태를 그는 '아타락시아'라고 불렀다. 이것이 진정한 쾌락이다. 배고픔이 해결되었을 때의 만족감, 목마름이 해소되었을 때의 안도감. 에피쿠로스에게 최고의 쾌락은 이런 소극적 쾌락이었다. 반면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감각적 즐거움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 책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마주하도록 유도한다. 그의 답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질문을 던지는 방식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현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에피쿠로스의 메시지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 문화, 대기업이나 공무원 같은 안정적 직장을 포기하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이 모든 것이 에피쿠로스적 사고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단순한 '힐링 철학'이나 '포기의 철학'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무신론적 유물론과 개인주의는 당시 기준으로는 급진적 사상이었다. 기득권에 맞서는 비판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우리를 따라다닌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불안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