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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배 Apr 02. 2018

나는 기레기입니다만......

저널리즘의 윤리에 관하여

이전 글에서 나는 내가 단 한 번도 언론인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내가 연예부 기자 딱지를 이름 석자 뒤에 붙이고 나서야 대학 내에서 언론인이 되고자 분투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이에 언론사 시험을 언론고시라고까지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고 놀라기도 했었다. 물론 대다수 기자 지망생들은 연예부 기자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지만. 언론고시에서 떨어지고 떨어진 사람들이 연예부 쪽으로 흘러온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물론 요즘은 연예부 기자가 되고 싶어서 도전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런 나였기에 '저널리즘'의 정의는 애초에 장착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정체성 역시 모호했던 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자라는 직업의 매력과 영향력을 감지하면서 또 자꾸만 자극적인 기사를 쓰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여겨지면서 '무엇이 잘 쓴 기사인가, '어떤 기자를 좋은 언론인이라고 하나'에 대한 개념들이 차츰 탑재되어 가기 시작했다.

기자는 취재력이 있어야 한다, 기자가 쓰는 글은 간결하고 읽기 쉬어야 한다, 기자는 좋은 질문을 뽑아낼 수 있어야 한다. 등등...

어깨너머로 현장을 배우면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기자상이 차츰차츰 생겼다. 진짜 좋은 기자가 되기 위해 연예부에서 주로 쓰는 가쉽 외에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사를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방송국, 신문사 공채도 몇차례 두드려 보기도 했으나 서류 전형까지만 합격, 카메라 테스트에서 늘 낙방했다.

시도를 해봤기에 딱히 미련도 없어 그 뒤로는 연예부 기자 생활에 제법 몰두했고, 연예부 기자라고 남들이 생각하는 가쉽과 자극적 기사만 쓰는 법은 없다며 의미있는 기사를 쓰는 연예부 기자가 되자고 마음 먹기도 했다.

실제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팽목항으로 가겠다는 후배 기자를 다독이며 "연예부 기자가 팽목항에 간다고 도움이 되겠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우리는 우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야한다"라며 지상파 방송국3사와 JTBC가 재난보도 준칙에 의거해 보도을 하는지 평가하는 시리즈 기사를 쓴 적도 있었다. 당시 주말은 물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야근까지 하며 방송 뉴스를 모니터하고 분석하는 일을 할 때는 뿌듯함에 벅차오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해당 회사에서 이런 시리즈물을 낼 수 있는 자유를 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바로 직전 회사는 그런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기자 스스로 어떤 논조를 가지고 사안에 접근하는 것을 싫어하는 회사,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되는 회사, 틀을 벗어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회사, 새로운 기획, 새로운 섭외를 가져오면 무조건 거부하고 기사를 내주지 않는 회사.

한 배우가 연기를 못해서 못한다고 기사를 쓸라치면, 데스크가 안절부절하며 "소속사에서 항의가 들어오면 어떡하니", "방송국에서 뭐라 그러면 어떡해" 발을 동동 굴리던 회사.

단독 인터뷰가 어려운 환경에서 단독 인터뷰를 가져오면 데스크가 나서서 "하지말자, 욕먹을 지도 모르잖아"라고 하던 회사.

지금 나는 그 회사를 나왔지만, 최근에는 미투 관련해서 기자들이 불필요한 가십으로 미투의 본질을 흐리지 말자는 논조의 기사를 쓰려하니 데스크가 나서서 "그거 말고 A가 B를 욕한걸로 기사를 쓰자"라고 하는 회사.

그런 회사에서는 아무리 기자 개인이 의미있는 기사를 쓰려고 해도 쓸 수 없다. 데스크 검열에 걸리면 기사 한 줄 밖에 나갈 수 없으니 무조건 잘 했다 칭찬하고 데스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은 선에서 비판의 날을 세워야 하는 그런 환경 안에서는 그 어떤 기자들도 그냥 순둥이 홍보직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대단하던 MBC와 KBS 마저도 권력의 입김에서 망가져버리지 않았나. 애초에 기자로서의 사명감 보다는 '빨리, 자극적으로'에 길들여진 연예부는 이런 횡포 속에 망가지기가 참 쉬운 곳이다.

두 팔이 다 잘린 심정으로 그 회사를 다니다 관두고 나니, 한편으로는 참으로 홀가분했다. 내 팔이 내 손이 내 손가락이 지금 이런 글들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유롭다.

여하튼, 사명감, 언론관 없이 시작된 나의 기자 생활은 한때나마 자부심으로 꽉 찼으나 금세 식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요즘 사람들은 여전히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욕한다. 나 역시 '저건 너무하네' 싶은 기사들도 본다. 그런데 기자는 회사원이다. 회사의 녹을 받고 사는 한 사람의 직장인이다. 회사에서 저널리즘의 기본 윤리, 방향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그 안에서 이를 고집하는 기자는 투사처럼 살아야만 한다. 대부분은 그런 투사가 되기 보다는 회사원이 되는 길을 택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회사원들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봐라. 가끔은 회사에서 부당한 일들을 겪어야 할 때가 있다. 그 때마다 당당히 저항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꿔나가려고 행동했나. 그러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쉽지 않았다.

그것이 가능한 회사가 있고 그것이 불가능한 회사가 있다.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데스크와 맞서 싸우며 내가 옳다 여기는 기사를 내보기란 쉽지 않다. 늘 겉돌아야만 가능하다.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저널리즘의 윤리가 보장되려면 회사 차원에서 이를 중시하고 보장해줘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절대 기레기 개인이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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