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면서 가장 좋아진 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별로인 사람들과 애써 어울리는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고달파지는 순간은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만 하는 때였다. 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회사 밖에서 만나는 타인이었다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무례한 이들은 보통 나의 처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곤 했다. 그들에게 애써 조아려야 하는 순간 초라함을 느꼈다.
‘어쩌면 저렇게 못돼먹은 심보를 가지고 있지’ 라고 생각되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딱히 악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오히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는 해야 할 마땅한 도리들을 적당히 뭉개버리는 능구렁이들과도 자주 부닥쳐야 했다. 그런 류의 사람들과 만나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를 때도 둥글게 둥글게 처신을 잘하는 것이 현명한 사회생활이었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대부분이 타인을 위해 소진되었던 날들이다. 타인을 위한 현명한 처신은 정작 내 자신을 너덜거리게 만들었고, 유독 축 늘어진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날에는 '무엇을 위해 이러고 살고 있나'라는 허무로 빠져들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며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그만두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절박함 속에 시작한 사업이 성취로 바뀐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나의 노동을 헐값으로 대하거나 인간을 대하는 상식이 없는 자들과 억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누군가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됐다.
여전히 간혹 만나는 무례한 이들은 비껴 지나갈 수 있게 됐다.
무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갑질을 하고도 뻔뻔하게 구는 사람들에게는 “같이 일 안 하셔도 저희는 괜찮습니다”라는 말로 한 방 먹일 수 있게 됐다.
인생에서 무례한 이들을 솎아낼 수 있게 되면서 나의 에너지는 온전히 나를 위해 사용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 그저 내 스스로를 더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됐으니까.
경제적 여유가 주는 가장 큰 혜택은, 나를 위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점인 것을 깨닫는 요즘이다.
지난 여름 즈음 설거지를 하다 만 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기분이 드네.”
“시집 참 잘 왔다”, “아니지, 내가 잘 키운 덕이지”라는 시답잖은 농담으로 그날의 대화를 마무리 했지만, 문득 나는 그릇을 씻다 말고 그런 기분이 들었었다.
아주 어린 시절,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소리를 들으며 느꼈던 감각적인 안정감을 지금 내가 일군 가정 안에서 느끼고 있다는 기분.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는 감정이 늘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저 이렇게 저녁 해 먹은 그릇을 씻고 두 다리 뻗고 자면 되는 하루를 살게 됐다니. 격세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