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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배 Apr 29. 2022

우리가 시골로 이사를 간 이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물어본 질문이다.


구태여 시골까지 이사를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라고.


질문을 많이 받다 보니 매번 조금씩 다른 답을 한 것도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시골로 이사를 온 이유는 한 가지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의 귀촌 계획은 신혼 여행에서 부터 시작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큰 아이가 태어나 자라면서 느끼게 된 부모로서의 감정들 때문인 듯도 했다. 뾰족하게 '무엇' 때문에 여기로 온 것은 아니고, 복잡다단하게 얽히고 설킨, 살아가면서 맞닥뜨린 상황과 그로 인해 얻게 된 깨달음들로 인해 이곳까지 흘러온 듯도 하다.

그래도 툭 던진 질문에 장황한 답을 늘어놓을 순 없으니, 나는 대부분 "아이들 때문이에요"라고 답하긴 했다. 물론 그 말도 거짓말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빽빽하게 틈이 없는 도시 환경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유년기를 선물해주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곳까지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온전히 아이들 때문에 시골에서 살게 된 것은 아니며, 어떤 측면에선 아이들을 핑계로 내가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질 때도 있다. 사실 아이들은 "엄마, 난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라거나 "엄마 시골 학교가 나랑 더 잘 맞을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그저 내 판단에 따라 남편의 의지에 따라 이곳에 왔으니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말이 때로는 조금 비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어했던 것은 늘 남편이었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주택에서의 삶을 꿈꿨는데, 내게 그것은 이뤄질 리 만무한 황당한 꿈으로만 다가왔을 뿐이다. 나는 주택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살아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귓동냥으로는 아파트에 비해 많이 번거롭고 불편하다는 것, 또 주택에서 사는 누군가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아파트의 매끈함과는 다른 투박한 벽돌집, 콘크리트 정원, 어두운 조명과 어딘지 추운 공기가 내가 느낀 주택에서의 삶이었다. 딱히 로망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작은 10여 평 빌라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당연히 언젠가는 30여 평의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 나의 주거계획이었다.


그러다 미국으로 간 신혼여행에서 내게도 집에 대한 개념이 새롭게 생기기 시작했고, 어쩌면 이것이 내게 생긴 전원주택 로망의 시초가 아닐까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신혼여행지에서 우리는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그곳에서 벌써 10년 가까이 삶을 꾸려가고 있는 친구네 부부의 미국식 하우스는 내게 대저택처럼 느껴졌다. 대로변에 위치한 3층 집은 현관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원시원했고, 널찍한 주방과 거실, 화장실은 또 왜 그렇게 많던지. 게다가 집의 외관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림 같은 집이었다.


친구는 2년 뒤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집을 떠나 이사를 갔다. 마침 그 즈음 우리는 또 미국을 찾을 일이 있어 친구가 계약한 집의 모델 하우스를 투어 할 기회를 얻었다. 하나 같이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환상적인 집들이었다.


아마도 모두의 드림 하우스일 법한 환상적인 그 집들의 가격은, 서울 학군지의 20평 아파트를 구매할 수 있는 가격과 거의 비슷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사다리가 어딘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군가들은 똑같은 돈으로 닭장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데, 누군가들은 저렇게 너른 잔디밭과 저택같은 집에서 살 수 있다니.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살 방도가 없으니 곧 잊어버리며 우리의 현실에 몰두하며 살아갔지만, 때때로 네 가족이 살아가기엔 좁은 20평 아파트들의 고공행진하는 가격대를 바라보며 미국의 집을 떠올리곤 했다. 


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맞벌이 부부의 삶이 그다지 녹록지 않음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특히 여성인 나는 직장 내에서 여러 문제들을 겪게 됐고,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바뀌게 됐다. 평생직장이라 여겼던 회사에서 뛰쳐나올 수밖에 없게 됐고, 절반은 타의에 의한 결정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다고 느낀 측면도 있었다. 남편 역시 나와 비슷한 길을 밟게 됐고 그렇게 우리 두 부부가 프리랜서가 되었다. 


그 말인즉슨, 꼭 출퇴근에 용이한 서울에 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나자!' 그래도 삶이 충분히 굴러갈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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