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이 앞에서 엄마는 마음껏 울 수 없다

뭐든지 흡수하는 나의 아기

by 유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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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나서 확실히 믿게 된 것이 있다. 세상엔 성선설도 성악설도 없다는 점이다.

아이를 낳고 보니 사람의 시작은 하얀 도화지다. 주변 모든 색들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다. 아이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에 확신이 든다.

아이는 주변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킨다.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없다.

아이는 환경에 민감하다.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모든 것에 반응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변의 어른들이 사소하게 흘린 행동과 말들을 어느 순간 모방해낸다. 그럴 땐 이 작은 인간의 능력치에 감탄을 하게 된다.

나는 아이에게 환경의 변화가 올 조짐이 있으면 최대한 미리 알려주려고 애쓴다.

"꿀아, 내일은 우리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날 거야. 선생님이 꿀이가 왜 아픈지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지 알려주신대."
"꿀아, 우리 내일은 외갓집에 갈 거야.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이 있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꿀이가 엄청 보고 싶으시대."
"꿀아, 우리 오늘 여행 갈 거야. 엄마랑 아빠랑 꿀이랑 셋이 바다 보러 갈 거야. 바다 가서 엄마 아빠랑 모래도 만지고 파도 소리도 듣고 오자."

아이의 표정을 보면 이 말들에 꼭 집중하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아이가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웬만하면 미리 알려주려고 한다.

한 번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경이로운 순간이 있었다.


시골에 계신 시할아버지 댁을 방문하기 전에 나는 아이에게 미리 알려줬다.

"꿀아, 우리 시골에 증조할아버지 뵈러 갈 거야.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버지야."

그 덕인지 몇 달에 한 번 뵙는 증조할아버지이지만, 아이는 할아버지를 낯설어하지 않는다. 요즘 낯가림이 시작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증조할아버지의 턱을 만지고 볼을 부비적 거린다.

경이로운 순간은 그 다음이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외출을 하셨다 돌아오셨다. 중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할아버지 앞에 쪼르르 달려간 아이는 문을 여는 것을 도와드리려고 했다. 들어오신 할아버지께 지팡이도 가져다 드렸다.

아마 어머니나 아버지 누군가가 할아버지가 들어오실 때 했던 행동을 기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버지'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던 것 같다. 주변에서 흡수한 모든 정보들을 조합해 16개월의 어린 아이가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고 행동했다.

아이가 만들어내는 이런 순간들은 벅차오를 정도로 놀랍다.


그렇지만 아이는 좋은 것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아이는 엄마가 습관처럼 하는 말들을 그대로 따라한다. 나는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아이 진짜'라며 짜증을 내는데, 아이가 그 말버릇을 그대로 따라하며 짜증을 내곤 한다.

아이가 화가 날 때 하는 행동들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다. 부모라고 하지만 여전히 감정처리들이 미숙한 엄마 아빠에게서 배운 행동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다.

실제 아이는 보호자의 감정에 굉장히 민감하다. 출산휴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 고작 100일도 되지 않은 아이가 뒤집기를 하는 모습을 보다 순간 울컥거렸다. '이제 복직을 하게 되면 아기가 처음으로 걷는 순간이나 아이가 처음으로 이유식을 먹는 순간을 내가 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엉엉 울어버렸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어색한, 아주 어리고 연약한 짐승에 가까운 신생아가 그런 엄마의 낯선 표정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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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가 주체할 수 없었던 감정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의 연약한 존재가 놀란 표정을 한 순간, 사랑이었을지언정 갑작스러운 감정을 아이 앞에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것이 과연 옳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양육의 과정에서 아이 앞에서의 감정 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여전히 고민되는 부분이고 아마 앞으로도 가장 많이 고민하게 될 부분일 것 같다. 엄마의 감정을 많이 표현해 엄마라는 사람을 이해시키는 것이 맞는 것인지, 부정적인 감정은 감추고 든든한 어른으로 존재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어떤 순간은 확실한 정답이 있는 것 같아도 어떤 순간들은 모호해진다.


아이의 세계가 더 확장되면서 아이는 타인의 다양한 감정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때로는 세상의 다양한 곤란한 감정들과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다만, 그 과정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큰 버팀목이 되어 아이의 극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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