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당연한 것이 희귀해진 시대

엄마에 대한 편견에 대하여

by 유이배

"육아, 정말 힘들죠?"


아이 엄마라고 밝히면 이내 따라오는 말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육아의 고충'을 들어주려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힘들긴 하지만 너무 예뻐요. 솔직히 둘째도 너무나 낳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다수의 사람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왜 그럴까.


육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제는 너무 극단적이다. 맘충 아니면 엄마의 고충이다. 그 시선이 엄마인 나는 너무나 아프다. 물론 워킹맘으로서의 고충은 내 스스로도 느끼는 부분이고, 단어 조차 쳐다보기 싫은 맘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례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엄마의 고충이 당연시되는 시대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이제 적어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되어 있다는 점이 반갑기는 하다. 그래도 극단적인 이야기들만 소비되는 시대이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육아=고통'이라는 명제 속에 갇힌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말하는 자리는 점점 더 적어지고 희귀해진다. 본의 아니게 나는 내 감정을 해명해야 할 때도 많다.


결혼을 한 후배들이 "아이는 못 낳을 것 같아요. 아이를 키워주실 분들이 없거든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들에게 "아이는 무조건 예쁘니까 낳아. 낳으면 다 방법이 있을 거야"라는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들을 위해서라도 사회적 논의들이 엄마의 고충을 자극적으로 풀어내기보다는 엄마가 행복한 육아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논의는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뻗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모성이라는 당연한 감정을 거세한 것은 오로지 엄마의 희생만을 담보한 사회적 구조였지 희생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나는 엄마 개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모성은 당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조적이고 차별적인 희생 앞에서는 모성도 반발한다고 느낀다.


아이를 낳아 스스로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이 가능해질 만큼 키울 때까지 잠자는 것, 밥 먹는 것, 화장실 가는 것,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구에 허들이 생긴다. 아이는 통잠을 자기까지 몇 달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 이번엔 엄마가 화장실 가는 공백 조차 불안해한다. 신생아 시절엔 다수의 끼니를 부엌 한편에 기대서서 밥을 국에 말아 후루룩 마시는 방식으로 해결하다가, 좀 키우고 나니 이제는 아이 밥을 먹여야 하기에 정작 내 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다.


이런 희생들 없이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런 희생 자체가 엄마를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이 희생을 부모가 같이 치르지 않고 엄마만 치르게 된다면 그 사실은 엄마를 불행하게 만든다. 엄마의 모성이 '왜 나만?'이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부부가 함께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부부의 관계가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희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스스로 뒤집고 앉고 서서 걷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나로 인해, 우리로 인해 가능해졌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주는 행복은 엄청나다. 희생을 감수하는 인간으로서의 행복감은 부부를 성장시킨다.



엄마로서 참 불편한 이야기, 맘충. 세상은 엄마라는 사실만으로 특혜를 당연시하는 이기주의 정도로 맘충을 해석하는 것 같다.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맘충 이야기는 내가 봐도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런데 사실 맘충 카페에서 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는 맘충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신도시 지역 카페에서도 비슷한 일은 버젓이 일어난다. 천박한 자본주의에 허우적대며 동네 자영업자들을 못살게 구는 그들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들을 맘충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굳이 충을 붙일 거라면 자본주의 충이라거나 지역 카페 충인 편이 더 낫겠다.


이들을 맘충이라고 부르는 것의 오류 때문이다 특혜가 아닌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하거나 당연한 권리를 말할 때도 누군가는 맘충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려 한다.


특히 '공공장소에서 우는 아기를 제대로 달래지 못하는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맘충이 돼버린 사람들은 나를 위축시킨다. 공공장소에서 우리 아이도 울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엄마라는 사람이 애도 못 달래냐'며 타박을 하는데, 달랜다고 달래도 그 지경인 것이 대부분이다. 아직 두세 살 밖에 안된 아이에게 윽박을 지르면 아이는 더 크게 운다. 그저 아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달랠 수 있도록 엄마는 진땀을 빼며 유도도 했다가 어르기도 했다가만 반복할 밖이다.


그런 내가 맘충일까?


한 번은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기차를 탄 적이 있다 내 옆엔 30대 후반 정도의 남성이 타고 있었는데 내가 아이를 안고 타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를 아기띠로 안고 무거운 짐을 위로 올리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에게 정중하게라도 도와줄 수 있냐고 말하지 못했다 도움의 요청 조차 표정을 찌푸린 그에겐 맘충으로 해석될까 지레 겁을 먹어서다


아이는 기차 안에서 당연히 가만히 있지 못했다 나는 주변에 피해를 줄까 아이를 안고 화장실 옆으로 갔다 잠깐 잠든 삼십 분을 제외하고 내내 서서 부산에서 서울까지 향했다


굳이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더라도 나는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차를 타보면 화장실 옆에 늘 그렇게 서 있는 아이의 엄마와 아빠를 볼 수 있다


터덜터덜 기차를 내린 순간, 내 옆의 그 사람이 나로 인해 모든 아이 엄마가 피해만 끼치는 존재는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면 되었다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럽기도 했다


나는 왜 아이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피로가 됐을까 그것이 과연 정당할까 싶어서다


본의 아니게 아이이기에 피해를 끼치는 일들은 생긴다 그렇지만 아이에게 성인 수준의 규율 준수를 요구받을 때 나는 화가 난다 티 내면 맘충이 될까 늘 자제하지만 말이다


엄마로서 살아본 세상은, 때때로 엄마의 고충을 다 들어줄 것처럼 안쓰럽게 바라보는 사람과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곁눈질을 하며 행여 자신에게 피해를 입힐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들로 양분되어 있다. 극단적 세계에 갇힌 사람들은 내가 내 아이로 인해 행복하다고 말하면 휘둥그레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지만 나는 고충만 느끼는 엄마도 맘충도 아니다. 나는 그냥 내 아이를 사랑하는 지극히 당연한 엄마다. 그 외에 그 어떤 프레임도 거부하고 싶다.


책임의 상당 부분은 논의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머무는 매스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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