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 많던 여자 선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by 유이배


나는 그녀와 대학 시절에 만났다. 그녀는 제법 똑부러진 인상이었고 실제로도 다부진 면이 있었다. 그녀 자신이 기억할지는 모르겠으나, 홍정욱의 '7막7장'을 감명깊게 읽었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녀 자신이 그처럼 되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만큼 매사에 당당했다.



나는 좀 시니컬한 면이 있어 홍정욱의 책을 읽으면서 꿈을 키우는 순수함 보다는 '금수저로 태어나면 뭔들 못하리'라며 다소의 신세한탄을 하는 인물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 시절 우리는 제법 괜찮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학교에서 선정한 장학생으로 외국 명문대에 유학 중이었으니 앞으로의 삶에 대한 회의보다는 기대가 컸다.


한국의 학교보다 더 광활한 캠퍼스를 오가며 외국어로 지식을 습득하는 재미 속에 꿈을 키우던 우리는 유학을 마치고는 각각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이름 있는 외국계 기업에 입사했고, 나는 작은 신문사에서 시작해 몇 번의 이직을 거쳤다.


간간히 SNS를 통해 보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당당하고 멋있어 보였다. 나 역시 나름 열심히 일해 방송 출연이나 외부 원고 청탁까지 들어오는 수준이 되면서 대기업 연봉에는 견줄 정도가 되었다.


회사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당당한 그녀와 업계에서 나름 인정받았던 나. 이쯤이면 꽤 괜찮아 보이는 인생 아닐까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 때의 우리는.


그리고 시간이 더 흘렀다. 세월이라 말하기엔 다소 민망한, 한창 일하던 시절로부터 고작 4-5년 정도가 더 흘렀을 뿐이다. 그 사이 우리는 일 하느라 바빠 자주 만나진 못했어도 청첩장 주고받으며 서로의 경사를 챙기는 것으로 안부를 대신했다.


나는 아이 엄마가 되었고 비슷한 시기 결혼했으나 아직 아이가 없는 그녀는 대학 동기들의 단체 채팅 방에서 ‘조만간 나도 낳긴 낳아야지 마음 같아선 셋도 낳고 싶네’ 라는 말도 흘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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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여전히 꽤 괜찮게 사는구나 여겼던 우리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점심 약속을 잡았다. 의미 부여를 딱히 하진 않았으나 처음 만난 때로부터 흐른 세월을 따져보니 꼬박 10년이 된 해였다.


긴 세월일 수도 있겠으나 서른 다섯인 우리는 충분히 젊고 한창인 나이다. 그런데도 그날의 우리는 노인들처럼 쭈그리고 앉아 절망을 말했다. 아무 것도 못할 것 없었던 그 시절로부터 고작 10년 만에.




곧 그만 둬야 겠지. 마흔 다섯 넘은 여자 선배가 회사에 없어.


그녀 말을 듣고 돌이켜보니 내 주변의 여자 선배들도 꽤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기자라는 직종의 특성상 승진 체계가 다소 허술한 점을 감안해도, 한 때 그 많던 선배들이 총총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마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조직에서 승승장구 하는 여자 선배들은 유니콘 같이 희귀했다. 그들,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외국계 회사는 그나마 여성친화적이라던데' 라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1년 육아휴직을 낸 여직원이 지금까지 단 한 명이었고, 그나마도 복직 이후 은근한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퇴사를 해버렸단다. 임원급 여성 비율은 너무 적어 세기도 민망한 지경이라는 사실은 국내 여타 대기업과 다를 바가 없었다.


"버텨봐야 10년도 못채울거야.”


지금으로부터 고작 7-8년 뒤라고 해봐야 이제 겨우 두 돌이 안 된 나의 아이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녀의 아이는 여전히 영유아 어린이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니.


“우리 학교 다닐 때 왜 그렇게 열심히 산거니. 고작 10년 쯤 일하고 저물어 지려고?!”

"아무래도 사업을 해야 하나봐."

"망하면 어떡해. 그런데 이직도 힘들겠지.”

"이직 시장에서 제일 꼴찌가 누구인지 알아?"

"알지. 결혼 했는데 아이 없는 여자."


그 시절에도 굉장했던 취업난을 뚫고 지금에까지 안감힘을 쓰고 달려와 봤는데 우리는 다시 먹고 살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언젠가는 경단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도대체 뭐하려고 열심히 살았나 싶은 헛헛함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민 갈까?”

“그래야 될까?”

“가서는 뭐 먹고살지.”

“그러게.”

“그래도 최소한 우리 아이들은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빠지게 두면 안되는거 아냐.”

“그러게.”


힘 빠지는 소리만 한창 하다가 그래도 여전히 씩씩한 그는 내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노력해보자. 화이팅하다보면 방법이 나오겠지.”


나는 그날 이후로 간혹 그 대화가 생각이 날적마다 아직은 뾰족한 묘수가 생각나지 않은 삶이지만 그래도 그녀와 내가 결국은 후회없는 삶을 살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볼 밖이었다. 누구의 탓을 하기엔 세상 전체에 가득한 부조리들이 너무 거대했다.


부디 우리의 이 시기가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일지라도, 우리는 마침내 씩씩하게 극복하여 어느 날 나름의 성과에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기를 바라본다. 10년 뒤의 우리는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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