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파스치모타나를 향해 나아가는 요즘이다. 파스치모타나는 전굴. 전굴의 기본은 나의 복부와 나의 허벅지가 맞닿는 것이다. 아직은 어떤 것이 올바른 전굴인지 나는 깨우치지 못했다. 그저 수련할 뿐이다.
전굴을 올바르게 수련하지 않으면 요통이 올 수도 있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다. 분명 모르지만 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다. 전굴을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요통이 생긴다는 것도 하면서 배운 것이니까.
매일매일 파스치모타나를 수련하면서, 인간이란 퍽 신기한 동물이다 싶었다. 그 어떤 동물도 할 필요를 깨우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인간은, 특히 요가 속에서 인간은 이 단순한 동작을 공들여 배우고 애쓰며 나아가려 할까.
파스치모타나를 통해 또 한 번 요가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요가란, 참으로 이상하다. 내가 어쩌다 요가를 하게 됐을까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은 인터넷에 퍼진 영상을 통해 따라해보는 것이었다. 딱히 요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시작했다기보다 요가가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장 부담없이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가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수영도 했고, 싸이클도 했고, 마라톤도, 필라테스도 했다. 웨이트와 P.T 수업도 가끔 받았었다.
그런데 가장 깊게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요가가 유일했다. 그 지점부터 내게 요가는 운동이 아닌 수련이었던 것 같다.
수련. 이 단어가 주는 신성함이 나는 퍽 좋다. 내가 스스로를 가꾸는 시간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가꿈의 대상은 몸에서 벗어난다.
요가는 살이 빠지는 운동이라기보다, 내 몸에 꿉꿉하게 붙은 피로감을 덜어내 혈액을 잘 돌게 만들며 정신까지도 개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요가를 하고 나면 묘하게 맑아지는 얼굴들이 이것을 증명한다.
전통적 개념에서 요가는 명상에 더 가까웠다. 명상 이전에는 고행이었다 한다. 그 고행은 일치를 위해 나아가기 위함이다. 일치란, 힌두계에서 믿는 신과의 일치였다. 명확한 지향점이 있었던 철학이고 그 철학으로 나아가는 행위가 바로 요가였다.
이런 요가의 특성을 종교적으로 해석해 논란이 인 적도 있었다. 그래서 현대의 요가들은 종교적 색채를 거두고 운동으로 변모한 측면도 있었으리라.
요가를 좋아한다 말하는 나 역시 간디처럼 금욕을 할 마음은 없고, 인도 전설 속 누군가처럼 나의 신체를 절단할 마음은 더더욱 없다. 다만, 나는 모든 것이 번잡한 가운데 각자의 선과 악이 뚜렷해 서로를 삿대질 하는 것에 익숙한 세계 속에서 요가가 지향하는 고요한 자기 성찰을 습관화 하는 것, 그것이 내 일상이 되는 것이 목표다.
그저 단정하고 단촐한 삶. 그 안에 늘 내 자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나. 고요하게 웃으며 마무리 할 수 있는 하루. 말이다.
# 동영상으로 보는 요가 지도자 도전기
https://www.youtube.com/watch?v=2yQgNWCyrco&t=197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