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이배 Dec 24. 2018

배울 것 없는 상사를 버텨봐야 병만 생긴다

<직장 상사로 괴로운 이들을 위한 조언1>

첫 회사에서 3년을 일하고 나는 첫 이직을 경험했다. 첫 조직의 업무환경은 그야말로 일 잘 하는 로봇 만들기 적합한 수준이었다. 오전 8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 냉장고를 열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먹은 뒤 다시 재택 야근을 새벽 1시까지 해야 했다. 일 외에 다른 삶이란 존재할 수 없는 날들. 정말 사람 사는 것이 아닌 일하는 기계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날들이다.


고작 10년 전 일인데, 그때만 하더라도 이를 버티지 못하는 것은 '도무지 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기적인 요즘 애들'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일이엇다. 결국 열정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과로 속에 내가 얻은 건 예민함과 독기였다.


한편으로는 나의 뇌구조가 업무에 적합하게 짜여있다보니 성장은 빨랐다는 장점은 있었다. 일종의 깡이라는 것도 생겨 낯선 사람들을 대상으로 취재를 해야하는 기자로 살기엔 제법 든든한 무기를 얻기도 했다.


3년을 기계처럼 산 보상으로 나는 누구나 아는 번듯한 경제지로 이직할 수 있었다. 그 두 번째 직장의 임원 면접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기자로 살면서 단 한번도 편하게 살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부사장이 얼마나 흡족해했는지, 나를 추천한 부장이 얼마나 대견해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당시엔 의미조차 제대로 몰랐던) ‘삶을 걸겠단’ 패기로 시작된 두 번째 직장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소규모였던 전 직장이 철저한 오너 중심의 중앙집권이라면 이곳은 일반적인 직장처럼 사수가 있고 팀장이 있고 그 위에 부장이 존재했다.

 문제는 팀장이었다. 히스테릭한 그녀는 수시로 소리를 지르고 사소한 실수에도 몸을 부르르 떨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사람이었다. 쉬는 날에 전화를 해서 소리를 질러대는 일은 예사였다. 당황한 내가 말을 더듬거리면 그대로 흉내내며 모욕했다.


지금 돌이켜생각해보면 그 때 바로 등을 돌려 피해갔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도망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겼다. 버텨서 그녀에게 기필코 인정받는 것이 내게 주어진 목표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일만 잘해서는 안됐다. 누군가는 그녀의 비위를 살살 맞추며 달래라고도 조언 했다. 술을 좋아하는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 무리해서 술을 마셨고, 취해있는 그녀에게는 “선배는 대단하다”, “선배는 참 훌륭하시다” 라는 아부를 퍼부어줬다. 그녀는 그 일들을 몹시 즐겼다. 그러나 다음 날엔 또 어김없이 소리를 질렀다.


반년 정도를 그렇게 살고나니 몸에 이상신호들이 찾아왔다. 자궁에는 혹이 생겼고 어떤 날엔 출혈도 있었다. 새전 처음으로 내 돈으로 보약까지 지어먹어 보았다. 물론 보약봉지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매끼 챙겨먹는 와중에도 의사가 되도록 피하라는 술 만큼은 말그대로 퍼마셔야 기자다운 후배로 인정받았다.  


간간이 다른 선배들이나 부장이 “힘들지?”라고 물어볼 때 처음엔 “아니다”라고 말했으나, 그쯤 되니 숨기고 말 것도 없었다. 실은 팀장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후배들을 대하는 팀장의 지나친 폭주는 회사 전체에서 꽤 유명했지만, 아무도 이를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팀 내에서 그녀는 필요악이었으니까.


그녀가 후배의 성과들을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는데 능했고, 후배들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으며, 그저 히스테릭했기에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실은 그녀에 기대어 선후배 위계질서를 강조하며 후배들의 과로로 버텨나가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8개월 만에 도망치듯 나와버렸는데, 그 뒤로 2년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도망쳐나온 패배감에 젖어 살았다. 내 삶을 걸겠다는 패기가 이렇게나 무력한 것인지 몰랐다며 자책했다. 스스로가 실패자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세월을 살아 본 서른 중반이 된 난 그 시절 내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사람을 굳이 버티지 않아도 된단다. 버텨야 이긴다는 누군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아도 된단다. 그보다는 너의 존엄성을 지키렴. 나를 파괴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내가 아직까지도 버티고 있다면 과연 그녀를 이겼다는 성취감을 맛 보았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그녀의 괴롭힘을 계속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을 밖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직들은 후배들에게 선배의 비상식적인 괴롭힘마저 감수해야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성장일까. 나서서 해결할 의지가 없는 조직이 만들어낸 판타지 아닐까.


실제 그녀의 괴롭힘을 견디고 성장한 사람의 사례를 그 뒤로 몇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가끔은 그 선배의 모욕에 대들어보았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알아들어요.”

“기본적인 인권은 존중하면서 말씀하시죠.”


차라리 그 놈의 성장이란 것은 이런 반격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조직 전체가 그녀에 의지하고 있는 한 개인의 이런 반격은 무용하긴 할테지만, 적어도 내 자신에게 그 시간이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기억되지 만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자 선배들이 사라지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