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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배 Jan 12. 2019

방황하고 고민할 수 있는 특권

29살에서 서른이 되던 해에는 낯선 것들이 참 많았다.


사소한 설문조사, 인터넷 사이트 회원가입에서 늘 고민도 없이 ‘연령 20대’를 기입하던 내가 어쩐지 주저하며 30대를 클릭할 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어쩌자고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어버린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직 이뤄놓은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이십 대 중반부터 몸 담은 커리어는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가곤 있었지만, 사적인 삶은 숭숭 구멍이 뚫려있었다. 거듭된 연애는 자꾸만 실패하고 결혼은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데 혼자 사는 삶은 상상도 안 가고. 무엇보다 서른이 넘고 보니 왜 이렇게 내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늘어난 것일까. 마치 내 인생이 당장 떨어질 아슬한 낭떠러지에도 있다는 듯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손아귀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즈음 나는 운동을 하며 서른의 성장통을 이겨냈다. 주중엔 바쁘더라도 꼭 짬을 내어 요가를 했고 주말에도 일어나자마자 요가나 필라테스를 하러 달려갔다. 날씨 좋은 봄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마란톤도 달렸으며 그렇게 일과 동 떨어진 나 만의 삶을 사는 법을 조금씩 배워갔다.


운동은 내게 내 몸뚱이 하나도 내 마음 같지 않은데 어찌 인생이 호락호락하겠냐는 진리를 그야말로 몸으로 깨닫게 해 줬다. 삶에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너그러워지는 틈들이 생겼다. 이십 대의 삶이 어느 날 툭 떨어진 매서운 사회에 적응해내느라 아등바등거렸다면 삼십 대의 시작은 받아들이고 둥글어지는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참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변화였던 듯 싶다.


이십 대의 힘든 시절 막연하게 서른이 넘으면 여러모로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서른의 삶도 절반 넘게 산 지금 그 답은 어느 정도는 맞았다. 이십 대의 삶 보다 지금이 편안하다. 그래서 그 시절을 돌이켰을 때 난 이십대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딱히 들지 않는다. 내 나름의 고생과 고난이 혹독했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라는 인간이 그 시기에 딱 그만큼의 고난을 겪었기에 지금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그때 너무 편히 살았다면 나이만 먹은 지금의 삶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 힘들다면 그런 자신이 정상이다 괜찮다 라며 한 번쯤 다독여주길. 방황하고 분투하고 깨지고 나뒹구는 그 삶을 버티어 곧 조금은 안정되고 모나고 못난 것만 같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편안한 시기도 곧 찾아오니까.


치열하게 고민하고 격렬하게 방황해보는 것은 그 시절이기에 괜찮은 특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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