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와의 화해

by 가을장미


명절 음식에는 전이 빠질 수 없다. 아버지는 어떤 음식이든 맛나게 드셨지만 밀가루만 입힌 노릇노릇한 경상도식 배추전을 특히 좋아하셨다. 엄마는 푸르스름한 몇 장은 떼어내 시원한 배춧국을 끓이고 노란 배추론 전을 부쳤다. 가을배추의 시원하고 달큰한 맛이 기름과 만나면 고소함까지 더해져 일품이었다. 명절 밥상에 오른 배추전을 보니 갑자기 십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도 응어리져 풀지 못한 어릴 적 사건도 함께.

내가 초등학교 입학 할 즈음, 직업군인인 아버지는 진해로 발령을 받았다. 온 가족이 함께 전국을 떠도는 이사의 시작이었다. 봄이면 벚꽃이 흩날리는 군항제가 열렸고 바다가 지척에 있는 따뜻한 도시였다. 아버지는 박봉에도 사진기를 장만해 커가는 자녀들의 모습을 찍었고 앨범 첫 장에는 잘 자라기를 소망하며 편지글을 써주셨다. 지금도 가끔 아버지의 정성이 깃든 사진들은 아련한 그 시절을 그려보게 했으니.

빛바랜 앨범 속 나는 앞니가 빠진 채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고 개구쟁이 남동생들도 촌스러운 짧은 머리로 해맑은 표정이다. 젊은 아버지의 얼굴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 서려있고 당시 유행하던 짧은 원피스를 입고 바닷가에서 양산을 들고 있는 신식 엄마의 모습도 있다. 촌스러워서 착해 보이는 건지 착해서 촌스러워 보이는 건지 정감 있는 가족사진들. 아버지는 말년에 이곳에서의 몇 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하셨다.

비록 반찬도 없어 뜨거운 밥에 빠다와 간장만으로 비벼 먹었고 건빵조차도 귀한 간식이었을지라도. 가끔 가족탕에서 목욕하고 자장면을 먹었던 외식의 기쁨이 있었다. 가난한 군인가족이었기에 엄마는 텃밭에 야채를 심어 생활비를 보탰고 폐결핵을 앓기도 했었다. 엄마의 마른 얼굴과 양볼의 주름이 그대로 보이는 사진들은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고생 끝에 부모님은 억척같이 서울 변두리에 집을 마련하셨다.

사건이 있었던 날은 토요일로 기억된다. 부모님은 양철지붕으로 된 관사 마루에 앉아 있었고 두 남동생은 집 앞 주변 풀밭에서 놀고 있었다. 난 그들과 좀 떨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서너 살 된 막냇동생의 비명 소리가 났다. 깨진 사기 조각에 넘어진 동생의 이마에선 피가 솟구쳤다. 엄마는 비명을 지르는 동생을 안고 병원으로 뛰었고 겁에 질린 나에게 아버진 무서운 표정으로 왜 동생을 제대로 안 봤냐고.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남동생은 그때 일로 지금도 이마에 상처가 남아있고 내 가슴속에도 억울한 상처가 채 아물지 못했다. 부모님도 같이 있었는데 왜 어린 내게만 책임을 물었는지 내가 동생 돌보는 사람인가 속상해하면서.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팔 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나셨다. 6.25 때 어린 나이로 참전했고 1.4 후퇴 때는 허리에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이송돼 육 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단다. 전쟁이 끝나고 직업군인이 되었고 결혼을 해서도 항상 동생들 학비며 뒤치다꺼리에 월급은 빠듯했으니 아버지의 어깨는 무거웠으리라. 엄마는 우리가 중고등학생이 돼서도 시동생들의 크고 작은 일들로 속병이 생기기도 했으니까.

결혼 후 내가 시댁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은 무조건 큰 아주버님 편을 드셨다. 맏이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가 하면서. 큰 아주버님을 통해 당신의 지난 삶의 무게를 다시 느끼는 듯했다. 아마 진해에서 막내아들이 이마를 다쳤을 때도 맏이로써의 책임감이 무의식 중에 맏딸인 내게 투영된 것이 아니었을까. 총탄이 오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을 아버지는 몇십 년이 흐른 뒤에도 가끔 악몽에 시달리며 비명과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깬다고 엄마는 말했다. 아버지에게는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이다. 계급사회인 군인으로 거의 평생을 지내셨으니 내재된 책임의식과 함께.

명절 연휴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가족을 주제로 깊이 있는 영화를 만드는 유명한 감독이었다. 그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영화는 서로 같이한 시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메시지와 실패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가슴 아픈 일을 이해하며 아버지로서 성장과 성숙해가는 내용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자식을 키워가면서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리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살면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게 아닐까. 한없이 가까운 듯하면서도 어떤 때는 아득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을 듯. 화해는 용서가 전제되어야만 하고 또 용서란 상대가 이해가 되어야만 할 수 있다. 오롯이 혼자서 책임지며 살아내야만 했던 아버지, 그 곡진한 삶 속에서 자녀들을 키워내야만 하는 가장의 무게가 누르고 있었던 것임을 어렴풋이 알아간다. 내게 무서웠던 그분의 눈초리와 목소리가 어떤 의미였는지.

아버지는 내가 넘을 수 없는 두려운 존재였다. 덕분에 난 그나마 맏이로서 책임감을 배웠고 내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 결혼해서 어려운 환경이 닥쳤을 때도 아내와 엄마로 내 책임을 직면하면서. 지금은 안 계신 아버지, 나 혼자라도 묵은 오해를 풀고 그분을 좀 더 이해하고 나 자신과 화해해야만 한다. 이젠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는 말을 나 자신에게도 해보면서.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그만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살다 보면그럴 수밖에 없는것이. 이젠 나 자신과의 화해도 더 이상 미룰일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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