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친정 엄마
11월 달력의 두 동그라미
올가을엔 유난히 단풍이 고왔다. 은행나무는 거리를 온통 노랗게 물들였고 내 마음에도 노란 물이 들 것만 같았다. 가을색이 이렇게 고울 수가. 산책길에 본 국화는 다양한 종류의 색과 짙은 향기로 발걸음을 붙잡았고 쌀쌀한 날씨에 홀로 핀 그 꽃은 과연 선비들이 사군자로 칭송할만 했다. 생명이 움트는 봄꽃도 좋지만 한살이를 마무리하는 가을 단풍도 그에 못지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평온한 아침 시간, 성경을 보고 기도를 막 끝냈을 무렵이었다. 이른 시간인데 책상 위에 핸드폰이 울렸다. 다급한 목소리의 요양원 원장님은 시어머니가 위급하니 속히 오라 했다. 황급히 남편을 깨우고 허둥지둥 갈 준비를 할 때 또다시 전화가 왔다. 심정지로 돌아가셨다고.
아들만 다섯을 둔 시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뜨고 몇 년 되지 않아 뇌경색이 왔다.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그녀를 모실 자식은 없었다. 축령산 요양병원 침상에서 십여 년을 보내야만 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세월이 지나갈수록 면회도 점차 뜸해지고 코로나 상황을 맞았다. 최근 2년 동안은 면회도 어려웠고 몇 달 전 추석 즈음에나 마스크 쓴 얼굴을 볼 수 있었을 뿐. 비닐 커튼 너머로 시어머니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형님의 말에 형제들이 다들 동의하면서 시어머니를 지인이 운영하는 양수리 근처 요양원으로 옮겼다. 가족적인 분위기의 아담하고 맘에 드는 곳이었으니까. 그곳으로 옮기는 덕분에 몇 년만에 가까이서 시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알아보고 고개를 들면서 손을 흔들었다. 마스크 속의 입은 웃고 있었으리라.
다급한 전화를 받고 도착한 요양원, 시어머니는 햇살이 드는 독방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희끗한 짧은 머리에 입은 오목했고 눈은 감겨 있었다. 야윈 손을 잡으니 아직 따뜻했다. 남편과 나는 침대 옆에 서서 어머니의 영혼을 받아주시라며 짧은 기도를 올렸다. 그녀는 긴 여행을 마치고 이제 편히 하늘의 부름을 받은 평온한 모습 같았다. 지난번 사드린 자주색 내복과 분홍 수면바지를 입은 채.
내년이면 시어머니는 백세를 앞두고 있었는데, 그나마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고통스럽지 않게 가신 것을 위안 삼아야 할까. 십여 년의 요양원 침대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신의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가족도 없이. 인생을 완주한 시어머니, 그녀를 하나님은 복이 있다는 그날의 말씀으로 인(印)을 쳐주시고 나를 위로하셨다. 갈 곳을 알고 믿음으로 천국 여행을 떠날 수 있으니 그것이 축복이리라.
장례일정은 황망한 중에도 저절로 진행되었다. 발인하는 날, 날씨는 왜 그리 좋았던지. 바람 한 점 없는 따스한 초가을 날씨였다. 어머니가 자식들 힘들지 말라고 기도를 많이 하신 듯. 마치 가을 소풍을 가는 것 같았고 고속도로 옆 들판과 산은 고운 단풍으로 눈이 부셨다. 영천 국립묘지에 ‘참전용사 박ㅇㅇ의 묘’. 드디어 시어머니는 그리워하던 남편 옆에 함께 묻혔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을 불렀고 남편의 기도로 어머님을 보내드렸다. 큰 형님은 나를 예수쟁이라 불렀다.
며느리로 큰 숙제를 마쳤지만 허전한 마음이었다. 우연히 김사인 시인의 ‘공부’라는 시를 접했다. 내 마음을 알고 쓴 듯한 시를. 시인도 자신의 어머니가 떠나시는 일 또 남아서 어머니를 배웅하는 그 모든 일을 마지막 큰 공부라고. 날이 저무는 일도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그리고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가 오는 일이 다 공부라고. 그처럼 삶의 끝날까지 배우는 것이라 여기니 나도 위로가 되고 견딜 만 해진다. 삶의 민낯을 미리 깨닫고 알려주는 것, 바로 그것이 시인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장례를 치르고 나니 11월 중순, 시장엔 김장거리로 가득했다. 11월 셋째 주 토요일은 항상 친정엄마의 김장날이었다. 그날이 되면 형제들은 김칫통을 몇 개씩 들고 본가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양념을 준비하고 밤잠도 설쳐가며 배추를 절인 아버지. 백여 포기에 필요한 많은 김장 양념의 간을 맞추는 엄마의 모습은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장군 같았다. 우리는 그 배추를 가져다 양념을 비벼 자기 통에 담기 바빴다. 오후 느지막이 커다란 스텐 대야를 씻어 마무리를 하고 나면 젊은 우리도 팔이 얼얼해지고 허리가 뻐근해졌으니 부모는 얼마나 더 힘이 들었을까. 십여 년 같이 모여 김장을 하니 다들 손발이 잘 맞았다. 올케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이었고. 아버지가 김칫통 위에 붙인 색인지에 각자 이름을 확인 후 차에 싣고 갈 때면 마음이 든든했다. 마치 한겨울 추위를 대비하여 도토리를 저장한 다람쥐처럼.
친정 엄마도 십여 년 전 월요일 아침 출근하느라 분주한 내게 전화를 했었다. 와달라는 전화 통화 후 엄마는 의식을 잃었다. 뇌출혈이었다. 몇 개월 투병생활 끝에 황망히 아버지를 따라 소천하셨다. 이제 11월은 두 어머니의 기일이 있는 달이 되었다. 벽에 걸린 11월 달력에는 앞으로 큰 동그라미 두 개가 그려질 것이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란 말이 와 닿는다. 아낌없이 주었던 나무, 가진 것을 다 줘버리고도 언제까지나 자식에게 더 주고 싶어 하며 기다리던 존재.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에서 또 나이 한 살을 속으로 새기는 그 나무에게 나도 배워야겠다. 늙을 수밖에 없지만, 나이테의 연륜만큼 지혜와 사랑을 담고서.
11월의 이 가을, 누군가는 낙엽과 열매들을 보면서 그것들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처럼 나도 가지치기를 하며 차츰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래본다. 그래야 내 인생도 곱게 단풍이 들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