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때나 어른이 때나 포켓몬은 '킹정'이지
유년기에서 청소년기,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주변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어마어마하다. 무엇을 보고 듣고 익히느냐에 따라 한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 하지 않던가.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는 만화영화, 요즘 용어론 애니메이션이 내 인생에 큰 자양분이었다. 어머니가 어디서 얻으셨는지, 1990년대 이전 공개됐던 옛날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들과 '톰과 제리' 시리즈를 손수 한 편 한 편에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들을 구해오셨다. 어렴풋이 30편은 족히 넘었다.
집에 있는 날에 심심하면 항상 그 비디오를 돌려보곤 했다. 얼마나 반복해서 봤으면, 비디오테이프가 너덜너덜해져서 화면에 잡음까지 생길 정도였다. 비디오 재생기가 문제인 줄 알고, 헤드 클리너를 돌렸던 날을 셀 수조차 없다.
라떼 이야기를 해보자면, 활자 신문에 TV 편성표 면이 따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적도 있다. 어렸을 때, 신문을 펴면 가장 먼저 보는 곳이 편성표였다. 왜냐하면 지상파 채널에 편성된 만화영화 시간을 항상 체크해야만 했고, 이것이 어린 시절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미리 알고 있어야 실컷 바깥에서 놀다가 본방사수를 놓치는 불상사를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여기에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전파를 탄 KBS 2TV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려고 전날 일찍 자거나, 어떻게 해서든 만화 시작 전에 일어나려고 고군분투했던 꼬꼬마의 기억 파편들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포켓몬스터도 나의 유년기의 한 꼭지를 장식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시 SBS에서 매주 수목 저녁 먹을 시간이 되기 직전에 방영했을 것이다. 다만 포켓몬스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SBS TV판보다 조금 앞섰다. 당시 여름방학을 맞이해 어학연수 차 머물렀던 캐나다 밴쿠버에서 인연을 맺었다.
그때 밴쿠버에는 이미 포켓몬이 상륙해 아이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공원 벤치에서 영문으로 적힌 포켓몬 도감 그림 책자를 읽었던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고, 콘솔게임 가게에는 N64용 포켓몬 스타디움이 맨 앞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걸 플레이하는 사람도 보였다. 한 번은 타이밍이 좋아서 한 번 포켓몬 스타디움을 플레이해보기도 했다. 아기자기하게 귀엽게 생긴 캐릭터들이 내 마음을 빼앗았다.
여름 방학 어학연수 채우고 귀국했을 때에는 포켓몬이 전파를 타고 한국서도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반 친구들 입에서 포켓몬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을 만큼, 포켓몬스터는 핫셀럽이었다.
당시 우리 반 교실 뒤편에는 아이들이 공용으로 쓸 수 있는 컴퓨터가 하나 설치돼 있었다. 그중 컴퓨터 게임에 일가견 있던 친구 녀석 하나가 플로피 디스크에 무언가를 담아왔다. 그 정체는 바로 이것!
컴퓨터로 정식 발매한 적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수중에 넣었는지 '포켓몬스터 그린'과 이를 실행시킬 수 있는 애뮬레이터 파일을 고이 담아 반 컴퓨터에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모두를 위해 귀한 걸 구해온 당신은 진정 귀인이로다.
그 해 가을과 겨울은 포켓몬 게임과 함께 달렸다. 그리고 '포켓몬스터 그린' 덕분에 집단지성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도 알았다. 플레이하는 사람이 달랐어도, 플레이어 주변에는 함께 모니터링하는 지원군(?)들이 상주했다. 하나둘 두뇌가 모인 덕분에 여덟 체육관 배지 수집은 물론이며 사천왕, 나아가 최고난도인 뮤 잡기까지 이뤄냈다. 그때만큼은 2002 월드컵 당시 4강 진출만큼의 환희였다.
포켓몬 게임만 유행한 게 아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포켓몬 인기에 편승해 포켓몬스터 151종이 그려진 고무딱지를 팔고 있었다. 이건 참을 수 없지. 적당하게 판이 깔리기만 하면, 각자 수급해온 포켓몬 고무딱지를 꺼내 한판을 거하게 벌였다. 숨 막히는 대결 속에서 딱지 빈부격차는 점점 커지고, 어떤 이들은 본전을 되찾기 위해 물량공세를 퍼붓기도 했다.
고무딱지 이외 띠부띠부씰도 학생들 사이에서 '잇템'이었다. 제과/제빵업체인 삼립에서 국찌니빵과 핑클빵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지 포켓몬을 빵까지 출시해 띠부띠부씰 전파에 나섰다. 이것이 하루 용돈 천 원대로 받는 아이들에게 크나큰 경쟁심리를 부추겼다. '포켓몬 프로듀스 151'이 열린 것이다.
삼립의 영악한 상술에 놀아난 아이들은 셀 수 없었고,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집에서 받은 용돈을 포켓몬빵에 전부 기부했다. 비록 목적은 띠부띠부씰 수집이었으나, 긍정적인 면을 꼽자면 띠부띠부씰 덕분에 잘 먹지 않았던 빵에 제대로 맛을 들였다. 밥만 잘 먹던 아이였는데, 나 빵 좋아했네? TMI 하나 공개하자면, 삼립에서 출시한 포켓몬빵 중에선 초코롤과 소보루빵을 가장 많이 사 먹었다.
학교는 우리에게 포켓몬 센터 같은 지대였다. 포켓몬 트레이너들이 각자 필요한 포켓몬을 트레이드하려고 센터에서 교류하듯, 아이들은 서로 원하는 띠부띠부씰을 다른 반까지 수소문하면서 트레이드했다. 어떤 아이는 중복된 포켓몬을 무료나눔하거나 돈을 받기도 했다. 문방구는 이러한 사실을 어디서 들었는지, 개당 100원씩 띠부띠부씰 랜덤 뽑기로 판매하면서 돈벌이에 합류했다. 포켓몬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과몰입하면서 매달려야 하는 걸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포켓몬스터가 10대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겨져 안주거리가 되었을 시점인 2016년 여름, 포켓몬 덕후를 열광하게 만드는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포켓몬이 나이언틱과 합작해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GO를 내놓았다. 스마트폰을 켜며 밖을 돌아다니다 포켓몬을 포획하고 친구가 되고 배틀하는 진짜 포켓몬 트레이너의 길이 열렸다. 한국은 아직 정식 서비스가 되지 않았으나, 우연히 속초가 일본 서비스 구역에 포함되면서 지우처럼 포켓몬 트레이너들을 꿈꾸는 국내 모든 트레이너 새싹들이 포켓몬을 잡으러 속초마을로 떠났다.
그 점에서 나는 운이 매우 좋은 축에 속했다. 포켓몬 GO가 처음 출시됐을 때, 남미 여행을 하던 중이었고 남미가 한국보다 빨리 정식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 때문에 포켓몬 GO 하는 한국인들 중에선 얼리어답터 겸 상위 1%라 자처하며(정말 혼자만의 심각한 착각) 남미 곳곳에 분포된 포켓몬 잡기에 나섰다. 귀국 전에는 뉴욕을 4박 5일간 걸으면서 포켓몬 GO와 함께 했다. 맞다, 이건 포덕으로서 자랑질하는 것이다.
주로 뚜벅이로 여행하는 스타일인 나에겐 포켓몬 GO는 최적의 게임이었다. 걸어다니면서 km도 채우고 길을 가다 야생 포켓몬도 만날 수 있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2017년 1월 한국에서도 정식 서비스가 시작될 때도,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기 전까지 가끔 해외여행할 때에도 내 파트너는 피카츄, 아니 포켓몬 GO였다.
예전과 달리 인기가 한 풀 꺾이긴 했으나, 포켓몬 GO를 향한 나의 열정과 집념은 여전하다. 비록 이런저런 일에 치여 살고 있어 광렙할 수 없는 직장인이나, 1주일 내내 포켓몬과 함께 끼고 다닌다. 만렙인 50을 향해 천천히 느린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2022년 3월, 끝나지 않는 팬데믹 속에서 큰 것이 왔다. 1990년대 후반을 주름잡았던 포켓몬 빵이 약 20여 년만에 전격 컴백한 것. 두 번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다시 출시되다니! 삼립의 전략이 제대로 통했구나.
20여 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출시된 지 10여 일이 지난 지금도 포켓몬 빵의 ㅍ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그 옛날 코 묻은 돈으로 포켓몬 빵을 구입해 띠부띠부씰을 모았던 아이들이 제법 경제력을 갖춘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빵을 판매하는 편의점마다 사재기하고 있어서다. 산책하다가 편의점 앞을 지나가면 '죄송합니다 오늘 포켓몬빵은 품절입니다'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포켓몬은 참을 수 없는데, 빵 재고가 바닥났으니 강제로 참고 있는 나. 이번 달 안에는 귀하디 귀한 포켓몬 빵을 한 번이라도 영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