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5일 기록 재구성
2012년 8월 15일 오전 8시, 빗방울이 내리다 말다 간을 보는 런던 유스턴 역. 광복절을 한국보다 8시간 늦은 영국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한국에선 중요한 기념일이자 공휴일인 이날, 내 유럽여행에 있어서 나름 중요한 곳을 향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유스턴 역을 찾았다. 맨체스터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위해서였다. 맨체스터를 방문하는 이유는 단 하나, '꿈의 극장'이라 불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 순례 때문.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한국에선 거의 국민클럽 급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한국 축구가 낳은 위대한 캡틴 '위숭 빠레' 박지성이 오랫동안 몸담으면서 활약했던 클럽이었으니까. 박지성이 그날 경기에 출전하는지 혹은 골을 넣었는지, 사소한 일거수일투족이 브리튼 섬으로부터 전달받을 때마다 대한민국은 큰 파도가 일렁였다.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한 게 계기가 돼 해외축구 경기를 좋아하고 유럽 클럽팀을 좋아하게 된 이들이 상당수였다. 어찌 보면 박지성은 19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족적을 남겼던 '차붐' 차범근 같은 선구자였다. 그래서 그를 '해버지(해외축구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나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맨유에 관심을 가지면서 좋아해왔다. 계기는 1999년 게임 FIFA 2000이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사상 최초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유명세를 떨쳤고, 그 결과 게임 내에서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자랑했다. 당시 국내 축구만 보던 나에게 FIFA 2000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탈출하게끔 만든 매개체였고, 그때 맨유를 만났다. 게임을 통해 호기심을 가졌고, 하나둘 팀을 알아가면서 팬이 됐다. 특히, 스타일리시하면서 프리킥을 기가 막히게 잘 차는 데이비드 베컴에 매료됐다. 2002년부터 MBC ESPN 채널을 통해 맨유 경기 중계를 보며 언젠가 저들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를 방문하겠다는 버킷리스트를 적었다. 10년이 지나서야 현실로 이룰 수 있게 됐다.
런던 유스턴 역에서 맨체스터 피카딜리 역까지는 2시간 거리.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날 맨체스터로 향하는 창밖 하늘은 회색빛 비구름이 잔뜩 몰려왔다. 그러다 비바람으로 창문을 때리다가 멈추다가 반복했다. 변덕 심한 영국 날씨가 런던에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빈도가 잦다고 짜증내던 영국인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사히 피카딜리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렸을 뿐인데 벌써부터 맨체스터 내음이 콧속으로 들어와 가득 채우는 느낌이 들었다. 기쁨을 잠시 뒤로 하고, 올드 트래포드까지 가는 트램 노선도를 자세히 살펴봤다. 블랙베리로 검색해본 결과 20분 소요된다고 나왔다. 생각보다 짧은 거리라서 기분은 더욱 들떴다. 올드 트래포드행 왕복 티켓으로 2.8 파운드를 지불하고, 트램에 몸을 실었다.
피카딜리역에서 출발한 트램을 통해 맨체스터 풍경을 조용히 감상했다. 맨체스터엔 축구 라이벌 클럽 유나이티드와 시티 이외 영국 대표 밴드 오아시스의 고향이기도 했다. 기분 내려고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선곡하며 흥얼거렸다. 계속 오아시스 노래를 듣다 보니, 갤러거 형제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마치 창밖에 보이는 거리 어딘가에서 라이브 연주를 해줄 것만 같았다. 몽환적이고 센티한 오아시스 노래가 이날만큼은 나를 위한 팡파르였다.
피카딜리에서 출발해 두 정거장 지나서였을까, 갑자기 트램에 탑승한 모든 승객들이 다음 역에서 내렸다.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앉아있는 외국인을 본 현지인 직원이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 올드 트래포드라고 말하자, 그는 "너도 내려야 해"라고 알려줬다. 알고 보니 다른 노선으로 가는 거라며 여기서 환승해야 한다는 것. 런던으로 돌아갈 기차가 오후 4시에 출발할 예정이었기에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오아시스 노래를 들으며 트램을 기다리던 중, 다른 트램 직원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 한국어와 영어가 혼용된 새파란 축구 레플리카를 입은 채 트램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이라도 쟤는 누굴까 궁금해서 말 걸었을 것이다.
직원A : 너 어디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나 : 올드 트래포드 가려고 해.
올드 트래포드라고 답하자, 직원A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보며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 남자도 축구팬이구나. 그러더니 동료인 직원B를 부르며 나한테 소개했다. 직원B가 유나이티드 팬이었다.
직원B : 너 유나이티드 팬이야? 반가워. 올드 트래포드 구경 가는 거야?
나 : 응, 나 거기 가려고 런던에서 당일치기로 온 거야.
직원B : 그래? 맨체스터는 1박 2일로 여행 와도 되는데.
나 : 그러고 싶었는데, 일정이 빠듯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시간 쪼개면서 OT(올드 트래포드 약자) 가.
직원B : 너 X나 후회 안 할 거야. OT는 죽여주거든!
두 사람의 대화가 부러웠는지 직원A도 살짝 끼려고 했다. 직원 A는 맨시티 팬이었다. 그는 나에게 조심스레 한마디 던졌다.
직원A : 혹시 너...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맨시티 홈구장 이티하드 스타디움의 본래명칭) 갈 생각 없어?
나 : 아니! 생각해 본 적 없어. 나 런던에서 여기 온건 OT 때문이지 이티하드 때문 아니거든.
직원B : 봤냐. '맨체스터=유나이티드'라고. 인정 좀 해라.
의도치 않게 직원A를 도발했다. 맨시티의 홈도 궁금하긴 했으나, 여건상 하루 만에 두 곳 다녀오는 게 불가능했다. 올드 트래포드와 정반대로 가야 했기에 이티하드까지 다녀오다간 기차도 놓치고 맨체스터에서 노숙하게 될 판이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유나이티드 팬 입장에서 딱히 매력은 없었다. 미안해.
동지인 직원B와 대화하다 박지성 이야기가 나왔다. 기분 좋은 "두유 노 지성 팍"이었다. 그는 박지성이 왜 맨유를 떠났는지 아쉬워했고, 나 또한 격하게 동의했다. 그러면서 박지성이 새롭게 이적한 퀸즈파크 레인저스를 듣보잡이라며 디스하며 나에게 가봤냐고 물었다. 맨체스터에 오기 하루 전, QPR의 홈구장을 찾아갔으나 내가 본 광경은 문이 모두 굳게 닫힌 고요함이었다. 내가 본 광경을 전하자, 직원B는 "거봐라. 후진 팀에 박지성이 가기엔 너무 아깝다. OT는 24시간 언제나 열려 있으니 오고 싶으면 돌아오라"고 남겼다.
트램 직원들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올드 트래포드에 도착했다. 아직 프리미어리그가 시작하기 전이라서 그런지 경기장 일대는 한산했다. 경기장 가는 길에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관광객 대여섯 명이 양손 가득히 쇼핑백을 들고 트램 역으로 향했다. 아마 올드 트래포드에 입성할 일본인 선수 카가와 신지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직원B도 나에게 카가와 신지에 대해 물어봤던 게 생각났다. "잘하긴 하는데, 박지성만큼 해줄지는 모르겠다. 한국 팬들은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해"라고 내 견해를 밝혔다. 카가와는 맨유 입단한 뒤, 박지성보다 못한 퍼포먼스를 보이며 두 시즌 만에 맨체스터를 떠났다. 물론 이것까지 예측했던 건 아니다.
꼭대기에 적힌 새빨간 글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보이더니 올드 트래포드가 '꿈의 극장' 답게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런던 올림픽이 끝난 지 3일이 됐는데도, 올림픽의 흔적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여기서 열렸던 올림픽 4강전이 생각났다. 브라질에게 맥없이 3대 0으로 당했을 때 아쉬움과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가 교차됐다가, 이후 밀레니엄 스타디움서 열린 동메달 결정전이었던 한일전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처음 본 여행객들과 얼싸안고 좋아했었는데.
레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한 뒤, 본격적으로 올드 트래포드 투어를 시작했다. 맨유에서 나눠준 한국어 안내판도 새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믿기지 않았다. 내가 여기 있다니. 이거 꿈 아니지? 스스로 볼을 몇 번이나 꼬집어봤는지.
내가 좋아라 했던 선수들의 기록 및 전시물 속에 당당히 한 축을 자리 잡았던 박지성을 보며 괜히 마음 깊숙한 곳에서 국뽕이 차올랐다. 이 날따라 박지성을 향한 팬심이 더 커졌던 것 같다.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깨달았다.
레전드 중 한 명인 데니스 로 특별관, 뮌헨 대참사 기념관, 알렉스 퍼거슨 감독 기념관 등 다양한 테마로 구성하며 150년 된 자신들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건, 출구 쪽에 자리 잡은 새빨간 대형 벽, 여기에 이 클럽에 거쳐 간 선수들의 이름이 입단 연도에 맞춰 적혀있다. 분명 맨유도 시작은 미약했을 테고, 여기까지 오는데 수많은 선수들이 거쳐가면서 지금 위상까지 성장했겠지. 인간의 역사는 영웅신화처럼 태초부터 위대하지 않았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빛을 본다는 걸 맨유 박물관을 구경하며 느꼈다.
박물관을 둘러본 뒤, 본격적인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 내·외곽을 둘러보는 시간이 왔다. 아직 여름 이적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어서인지 TV에서는 축구선수들의 이적 소식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TV엔 맨유와 링크된 네덜란드 공격수 로빈 반 페르시 이야기도 나왔다. 투어 안내를 맡은 중년쯤 되어 보이는 큐레이터 아저씨는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냐"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아저씨 말대로 몇 시간 뒤 오피셜이 뜨며 맨유에 합류했다.
경기장 투어하면서도 내 존재는 또 한 번 이목을 끌었다. 큐레이터 아저씨는 날 보더니 "웨어 알 유 프롬?"이라고 물었다. 사우스 코리아라는 답에 다시 한번 나오는 "오우! 지성 팍". 지성이 형 덕분에 또 주목받았다. 이후 드레싱룸에서도 박지성이 지난 시즌 앉았던 자리도 친절히 알려주셨다. 아저씨 땡큐 베리 머치. 맨체스터에서 한국인으로 주목받고 싶다면 치트키 박지성을 언급해라. 단, 유나이티드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만.
나와 같이 투어하던 노르웨이 노부부도 내가 한국서 왔다고 하니 "박지성"을 외치며 좋아해줬다. 맨체스터에서 한국인이 환영받는 방법이다. '동안의 암살자'로 유나이티드에서 슈퍼서브로 날렸던 레전드, 현 맨유 감독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노르웨이 출신이다. 노부인은 "솔샤르가 퍼거슨 뒤를 이어 맨유 감독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는데, 요즘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졌다. 잘 지내시겠지?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로 투어를 끝마쳤다. 출구로 이어진 메가스토어에서 뭐라도 사고 싶었다. 그런데 예산이 그리 넉넉지 못했다. 돈이 부족해 빠듯하게 여행 중인 대학생의 슬픔이로다. 아쉬움을 부여잡고 아이쇼핑을 하며 만족하는데 그쳤다.
메가스토어 밖을 나오자, 나를 맞이하는 건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폭풍우였다. 분명 이곳에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살짝 흐렸을 뿐인데, 이게 무슨 일이람. 런던행 기차는 3시간 뒤에 출발 예정이었다. 아직 여유가 있긴 했으나, 폭풍우가 지나가길 팔짱 끼고 천천히 기다릴 순 없었다. 정면돌파다. 폭풍우는 내 발을 묶으려고 안달 난 모양이었다. 거센 바람에 우산은 너무나 쉽게 뒤집혔고, 우산살에 손가락이 베이는 사고도 일어났다. 급한 대로 휴지를 꺼내 철철 넘치는 빨간 피를 지혈했다.
트램을 타고 맨체스터 중심부에 내려서도 폭풍우는 계속됐다. 고장 난 우산을 들고 트램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버거킹으로 피신했다. 당연히 홀짝 다 젖었다. 버거킹 직원은 물에 빠진 생쥐꼴인 내 모습을 보고 안쓰럽게 쳐다봤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임 오케이. 와퍼 세트를 주문해 허기진 배를 채웠다. 유리창 밖에 비친 맨체스터 시가지 풍경은 폭퐁우의 기습에 모두 재빠르게 피신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남성 한 명이 트렌치코트로 최대한 몸을 감싸며 뛰어가고 있었다. 트렌치코트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방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머리에 쓰고 있던 페도라가 바람이 날아가버렸다. 그걸 잡으려다 빗물이 미끄러져 꽈당 넘어졌다. 저 남자에게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구나.
와퍼를 먹고 나올 때쯤, 폭풍우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늘은 서서히 개고 있었다. 한편으론 다행이긴 한데, 홀딱 젖어버린 양말과 신발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원치 않게 런던행 기차에 함께 탑승한 승객들에게 민폐객이 됐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다. 버킷리스트를 달성한 짜릿함과 남은 인생에 다시 한번 방문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다음번 방문할 때는 꼭 축구경기를 보고 싶은데, 그날이...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