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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Jun 13. 2021

4.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절친을 사귈 확률

2016년 8월 7일~11일 기록 재구성

 1/8,145,060.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란다. 지금까지 로또를 구매한 역사에서 가장 높은 등수가 4위였다. 그것도 딱 한 번. 1등은커녕 2, 3등 구경도 못해봤다. 그만큼 확률이 희박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질문을 한 번 해보겠다.


지구 정반대 편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관계를 맺어 절친으로 발전할 확률은?

다소 비약일 수도 있겠으나, 이 또한 로또 1등 당첨될 확률과 비슷하게 매우 희박할 것이라 생각된다.


여행을 하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 많다. 그들 중에서 잠깐의 접점이 생겨 교류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나아가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굳건한 여행 메이트로 발전하기도 한다. 가끔 여정이 끝난 뒤에도 끊어지질 않고 인연을 이어가는 이들도 있는데,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대단히 어렵다. 여행을 많이 다닌 이들이라면 공감할 부분. 그 어렵고 귀한 인연을, 지구 정반대 편에서 만났다.  



2016년 8월 8일 오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벨리스코 앞. 뉴욕의 타임스스퀘어처럼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가지 중심부를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약속 장소를 쉽게 정할 때 오벨리스코를 많이 이야기한단다. 실제로 오벨리스코에서 도보로 쉽게 이동해서 갈 수 있는 곳이 많다.


전날 저녁 엘 칼라파테에서 비행기를 타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건너온 나는 오벨리스코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슬릭백 헤어에 살짝 기른 수염, 무던한 짙은 회색 계열 집업과 반대로 강렬하고 화려한 꽃문양이 그려진 검은색 티셔츠 등 범상치 않은 힙함을 풍기는 한국인이었다. 영화 '럭키' 메인 OST '그 사나이'를 배경음으로 깔아줘야 할 것 같다. 그 주인공이 나와 만나기로 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 대해 소개하자면, 남미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정보 공유하는 오픈단톡방에서 핫셀럽이다. 이름은 석기, aka 마르코. 실제로 스페인어 이름으로 사용하며 단톡방 사람들도 본명보단 마르코로 부르고 있다(그의 본명은 실제로 만나 통성명한 사람들만 아는 정도다).


그가 단톡방 내에서 핫한  어마어마한 여행 스케일 때문이었다. 전역하자마자 동해바다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으면서 마르코의 세계여행이 시작됐다. 그는 유럽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로 들어온 ,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남미  바퀴를 돌고 었다. 그러던  우연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체류 중인 사실을 알게 됐고, 우연히 시간이 맞아떨어져 동행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경제위기로 고국 화폐가치 급락과 외환보유액 부족 현상을 오랫동안 겪고 있었다(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때문에 부에노스 아이레스 번화가인 플로리다 거리에 가면 아르헨티나 페소 환전을 쉽게 할 수 있는 암거래상들이 많다고 전 세계 여행객들에게 소문났다. 때마침 페소 환전이 필요했었고, 플로리다 거리는 오벨리스코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웠다. 역시나 외국인 여행객이 등장하자 숨어있던 암거래상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나에게 몰려들었다. 이를 단번에 정리한 사람이 석기였다. 스페인어 전공자답게 유창한 의사소통과 여유로움, 혀를 내두르는 협상력으로 환전에 큰 이득을 봤다. 나도 어디가선 흥정에선 밀리지 않는 사람인데, 그를 보며 감탄했다. 첫 만남부터 남다른 포스를 내뿜었다. 카우치서핑을 통해 찾은 현지인 집에서 언어장벽 없이 자연스럽게 구성원처럼 머무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바위처럼 믿음직한 그 사나이, 거짓없는 너털웃음 마르코.



이날 내 계획은 환전 후 아르헨티나 유명인들이 묻혀있다는 레콜레타 공동묘지 방문 이외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선 스카이다이빙과 탱고 구경, 보카 주니어스 홈구장 방문만 염두한 채 러프하게 계획을 짰다. 석기의 강렬한 첫인상을 보며 나도 모르게 끌렸던 것 같다. 그래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초행길을 전적으로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 녀석이 내 마음을 읽었나, 레콜레타 가는 길에 100년 넘은 오페라 서점 엘 아테네오가 있다고 알려줬다. 오! 론리 플래닛에도 못 봤던 정보다. 엘 아테네오 내 오페라 극장의 흔적들과 스테이지에 설치된 테이블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엘 아테네오는 시작에 불과했다. 한국에선 다소 생소하나(요즘에는 알음알음 알려졌다) 아르헨티나 현지에선 스테디 공연인 푸에르자 부르타의 존재부터 국립미술관과 작은 못 한가운데 설치된 대형 금속꽃 플로랄레스 헤네리카, 기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소소하게 구경하거나 산책할 거리 등을 석기 덕분에 알았다. 물물교환처럼 나는 앞으로 석기가 가야 할 행선지에 대한 최신 정보들과 꿀팁을 대량방출했다. 영양가 높은 가성비 최고의 프리워킹 투어를 한 느낌이었다. 잠깐 내린 비도 우릴 막을 수 없었다.


동행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레 대화도 많아지는 법. 생각보다 나와 맞는 구석이 많았다. 여행을 크게 러프하게 구상한 뒤 당일 여행은 즉흥적으로 정하는 스타일이나 유연함, 걷는 걸 좋아하는 성격, 축구에 환장하는 것, 여행하면서 포켓몬GO를 동반하는 점 등등이 그랬다. 내가 동행인을 잘 만났다는 생각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그래서였을까, 진한 육즙이 묻어난 아르헨티나산 소고기 패티로 만든 맥도날드 로컬버거 세트만 먹고 헤어지기엔 아쉬웠다. 한 끼 더 식사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 열심히 맛집을 검색했고, 현지서 유명한 레스토랑인 파릴랴 페냐를 찾았다. 엠파나다와 아사도, 샹그리아를 같이 먹으며 그날 하루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게 다 귀인 마르코 덕분이다.


8월 10일, 현지인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다가 오랜만에 한국인 민박집으로 옮긴 지 2일차. 석기가 내가 묵던 숙소로 찾아왔다. 탱고의 발원지 카미니토 거리가 위치한 보카 지구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가는 방법을 찾던 중 보카 주니어스 홈구장 에스타디오 알베르토 J. 아르만도(애침 라 봄보네라)도 거쳐간다는 정보도 얻었다. 제대로 얻어걸렸다. 주저 없이 보카 지구로 출발했다. 이날은 두 남자 이외 숙소에서 얼떨결에 합류한 한국인 여성 여행객 2명과도 함께 했다.  



보카 지구는 알록달록한 원색 양철판들과 아기자기한 골목이 자랑인 카미니토 거리 때문에 많이들 찾는다. 또 지나가다가 즉석 탱고 공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작은 거리이긴 하나 매력적이다. 동시에 남미 여행 단톡방 등을 포함해 여행객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식들이 도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슬럼가가 밀집된 곳이라 종종 소매치기나 무장강도를 만나는 일도 있다는 것. 그 때문에 아르헨티나 정부서도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관광지역을 따로 지정해 해당구역만 방문하라고 권장할 정도.


지금 돌이켜보면, 보카 지구로 떠나는 4인방의 여행은 겁이 없었고 천운이었다. 콘스티투시온 역에서 하차해 라 봄보네라, 카미니토 거리까지 모두 도보였다. 오직 스마트폰에 설치된 구글맵이 알려준 최단거리로 움직이다 보니 보카지구 내 골목골목을 누비기도 했다. 우범지대를 활개치고 다녔으니 위험천만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도보를 택한 걸까.


그 이유 중 하나로는 석기의 존재감도 한몫했다. 나머지 세 명을 홀로 이끄는 그가 유독 현지인 같은 포스를 뽐냈다. 여기에 아르헨티나식 스페인어를 네이티브처럼 구사하는 남자의 동료들이 네이비색 계열 복장으로 칙칙한 분위기를 내는데, 누가 여행객으로 생각했으랴.


카미니토 거리에서도 정부가 지정한 관광구역을 조금만 넘어선 적이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고, 그때 지정한 구역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나와 두 여성은 전혀 인지하지 못했는데, 우리를 붙잡은 사람이 석기다.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알아듣는 그가 카미니토 거리서 장사하는 상인들의 경고 메시지를 알아듣고 한국어로 전달했다. 그가 살렸다. 놀랍게도 같은 날 한국인 관광객 3명이 보카지구에서 무장강도를 만나 금품, 여권, 전자기기 등 모두 털렸고, 이 소식을 다음날 아침에 알게 됐다. 석기가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 또한 보카 주니오스 유니폼 살 돈을 보카지구 무법자들에게 바쳤을지도. '신과함께' 대사를 빌리면 마르코는 귀인이요, 귀인. "석기 세이브 어스!".

  

8월 11일. 고대하고 고대했던 스카이다이빙이 기상악화로 인해 취소 통보를 받은 날. 몇 안 되는 계획이 엎어졌고, 결국 무계획의 날이 됐다. 이날의 메이트도 어김없이 전날 만난 석기였다. 무계획+즉흥적에 익숙한 두 사람은 일단 민박집 근처 샐러드바에서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뭘 할지 생각해봤다. 스카이다이빙 취소로 인한 플랜 B를 찾다가 석기가 아르헨티나 오기 전 먼저 방문한 우루과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를 참고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콜로니아-새크라맨토행 왕복 티켓을 다음날로 끊었다. 무쵸 그라시아스!



자, 이제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쓸데없고 진지한 논의를 펼쳤다. 돈 적게 들고, 돌발변수 없고 느긋하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을 찾다 '해피투게더'가 생각났다. 여요휘(양조위)와 하보영(장국영)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했던 곳이 여기 부에노스 아이레스였지 않나. 특히, 그들이 술을 마셨던 바도 생각이 났다. 산텔모 시장 부근이라고 구글맵이 친절히 알려주면서 바 수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가는 타이밍이 나빠서였을까.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바 수르는 굳게 문이 닫힌 상태였다. 양조위도, 장국영도 보이지 않는 바 수르 앞에는 보도블록 공사가 한창이었다. 역시 땅거미가 진 뒤에야 왔어야 했나. 아쉬운 마음에 예스러운 멋을 내는 가게 전경만 이리저리 핸드폰으로 담아내는 걸로 만족했다. 인근 산텔모 재래시장도 한산했다. 토요장인데, 목요일에 방문했으니 조용한 게 당연하지. 그나마 다녀왔다는 기념품 격으로 시장에서 초록빛 페인트로 칠한 마테차 휴대용 나무 컵 하나를 샀다.


이때부터 뚜벅이처럼 계속 걸었다. 특별히 목표나 목적지 없이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보카 유니폼을 입은 칼리토(축구선수 카를로스 테베즈의 애칭)와 힙한 마르코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심 속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등짝에 적힌 칼리토를 보며 반갑다고 격한 리액션을 해주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꽤나 재밌었다. 기승전결 없고 뚜렷한 서사도 없는 두 한국인의 로드무비는 아바스토 쇼핑센터까지 이어졌다.


높디높은 쇼핑센터 천장에 닿을 것 같은 관람차 아래에서 컵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멍 때렸다. 그러다가 여행객이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야기를 털어놨다.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 남미까지 오게 된 과정, 여정이 끝난 뒤 목표 등등. 이런 이야기까지 하다 보니 동고동락한 전우를 넘어 어느새 절친이 되어가고 있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인연을 지구 정반대 편에서 얻었구나. 만난 횟수가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짧더라도 깊고 진하면 그 또한 연이 될지니.


8월 13일, 나는 이과수 폭포행 비행기를 탔다. 마르코는 나보다 늦게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 엘 칼라파테에 도달했다. 이후에도 종종 연락하며 안부를 전했다. 5년 뒤인 지금도 -ing다. 가끔 오프라인으로 만나기도 한다. 사이버 절친은 아니니 의심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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