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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Jun 06. 2021

2. 도쿄 아키하바라에서 때아닌 한일전

2016년 12월 29일~31일 기록 재구성

내가 "베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예전에는 분명 많았던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혹은 환경이 바뀌어서인지 점점 베프 카테고리 안에 속한 이들이 줄어들었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저마다 사정 때문에 점점 소원해졌던 게 이유다.


현재 "내 베프"라고 자신 있게 칭할 수 있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먼저 내 입에서 언급되는 이는 희진이다. 수도권으로 전학 와서 처음으로 사귀었던 친구고, 현재까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기준 20년 지기다. 지금 돌이켜봐도, 이 녀석과 절친이 된 게 가끔 신기하다고 느낄 때 있다. 겹치는 교집합이 생각보다 적기 때문. 중학교 때 같은 반을 한 번 했고,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해 졸업했다. 대신 나는 문과, 희진이는 이과라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 될 일은 없었다만. 그 외 DJ 듀오 저스티스에 열광하고, EDM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전 격투 게임 철권에 이성을 잃고 환장한다. 이게 전부다.


반대로 생각하면 교집합 범위가 적고 상극인 성향이었기에 되려 큰 마찰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을지도 모른다. 가끔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새로운 분야에 입문하듯 신기하다는 듯 집중하며 듣게 된다. 이것이 두 남자의 우정이 단단한 비결일 수도.


재밌는 건, 두 절친의 동반여행은 현재까지 통틀어 딱 한 번이었다. 어쩌다 2박 3일 떠난 일본 도쿄 여행이 그것. 정말 우연의 일치였고, 앞으로도 같이 갈 확률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2016년 12월 중순. 카톡으로 대화하던 중 연말 계획 이야기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서로 스케줄이 비었다. 그래서 연말에 생애 처음으로 절친과 해외로 떠나기로 급결정됐다.


조건은 오직 하나, '비행시간 6시간'을 넘지 말아야 할 것. 둘 다 '유동적 여행 무계획충'이긴 하나, 귀국할 때 돌발변수로 인해 딜레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가성비를 따지던 중 인천-도쿄를 오가는 항공편이 연말을 기념해 싸게 나온 것을 발견, 주저 없이 예매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에어비앤비를 통해 우에노공원과 가까운 곳으로 잡았다.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도쿄행이 결정됐다.


나머지는 도쿄 도착해 정하기로 구두합의했다. 비록 서울보다 면적 두 배 이상 큰 도쿄이긴 하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스케일이 남달랐던 유럽-남미를 경험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숱한 경험으로 단련됐기에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고, 도시 하나쯤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도쿄 세부 계획은 D-데이가 올 때까지 쭈욱 미뤘다.


2016년 12월 29일 오전 11시 45분, 일본 나리타 공항. 3시간 만에 섬으로 날아왔다. 에어비앤비 호스트 에츠코가 알려준 대로 게이세이 전철을 타고 나리타에서 닛포리 역에서 내렸다. 미팅 포인트에서 5분 정도 기다렸더니 흰색 경차가 다가왔다. 운전석에서 창문을 내린 에츠코는 나와 희진이를 확인한 뒤, 뒷좌석에 타라고 말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영어 반 일어 반 섞어 자기소개와 일본에 도착한 소감을 물었다. 중·고등학교 제2외국어 시간 때 배웠던 일어들을 최대한 쥐어짜내 짧은 몇 마디를 구사하자, 에츠코는 일본어를 잘한다며 놀라워했다. 생각지도 않은 칭찬에 약간 민망했다.


10분 뒤, 우리가 묵을 숙소에 내려주면서 집 열쇠를 건네줬다. 그러면서 에츠코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호스트로서 의무를 다했다. 그녀가 제공한 숙소는 아늑한 평수이긴 하나, 침실부터 거실, 1인 샤워실과 화장실 대형 소파 등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물로 가볍게 샤워하고 소파에 널브러졌다. 꼭두새벽부터 인천공항에 나온 후유증인지 희진이는 침대에 뻗었다. 약 2시간 정도 쉬었을까, 해가 서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졌다. 이제 어디라도 가봐야겠다며 두 남자는 무작정 숙소를 탈출했다.


구글맵 앱에 의존하며 도보로 2, 30분가량 걸었더니 우에노 역과 우에노 공원에 도착했다. 매우 유명한 곳이긴 한데, 유동인구만 많았을 뿐 두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요소는 없었다. 트립 어드바이저에 따르면, 인근 시장에 유명한 돈가스 가게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푸짐하게 도쿄 첫끼를 때웠다.


발 가는 대로 움직이는 여행객들의 장점은 시시각각 가고 싶은 곳을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게에서 나오기 전, 스카이트리가 도쿄타워보다 더 핫하다는 후기를 보고 차기 행선지로 정했다. 스카이트리는 롯데월드타워와 롯데월드몰을 닮았다. 하늘에 구멍 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겠다듯이 끝없이 높게 뻗은 마천루, 도시인들이 좋아할 만한 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도쿄 전역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는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이왕 왔으니 우리도 비싼 돈 주고 스카이트리 전망대를 구경해봐야 하지 않겠나. 정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전망대에서 최대한 서로의 인생샷을 찍어주면서 다시 한번 유리창 너머 도쿄 야경을 살펴봤다. 도시의 모든 모습이 보이진 않았으나, 도쿄 도심이 내는 불빛은 제법 아기자기했다. 어떤 각도에선 남산타워에서 바라보는 서울 전경과도 닮아 보여 친숙함도 느껴졌다. 촘촘하게 박힌 불빛 뒤로는 도쿄만도 보였다. 밤하늘과 비슷한 시커먼 색을 띠는 바닷속에서 거대한 고질라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스카이트리로 바라보는 도쿄 야경에서 차갑고 삭막한 도시의 단면도 느껴졌다. 아이돌 칼군무처럼 자신들이 정한 선에 따라 오와 열을 철저히 지키는 건물들, 어두워서인지 건물들의 생김새도 한국에서 본 것들과 비슷해 보였다. 나라와 상관없이 도시 야경은 같은 느낌인가 혼자 생각하며 도쿄의 첫날밤을 조용히 보냈다.


2016년 12월 30일, 그해 마지막 금요일. 어젯밤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며 도쿄 둘째 날에 무얼 할까 정해봤다. 우리는 오직 하나만 생각했다. 마리오카트 현실판인 마리카를 타며 도쿄 도로를 누비는 것. 아쉽게도 당일 예약을 할 수 없다는 안내문구를 발견했다. 차선책으로 여행 마지막날 저녁에 피날레를 장식하고 하네다에서 출국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나름대로는 "꽤 멋진 굿바이 아니냐"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하루 뒤에 만날 마리카를 잠시 접어두고, 우리는 아키하바라로 향했다.



서브컬처계의 성지, 일명 오타쿠 컬처의 본고장 아키하바라. 또 다른 별명으로는 도쿄의 전자상가 중심지. 나와 희진이에게는 후자가 더 가까웠다. 오락실에 환장하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오락실의 성지 아키하바라 세가 가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세가 1호점을 방문했다. 종목은 철권. 각자 동네오락실서 한끝 날린다고 자부해온 만큼, 철권의 본고향 일본 도쿄 인들과 한판 겨뤄보고 싶었다.


호기롭게 각자 철권 7 FR 오락기 하나씩 잡고 동전을 넣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후에 대참사라 벌어질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믿기 힘든 광경이 벌어졌다. 나름 동네 오락실 평정했다는 한국인 2명이 처참하게 밟혔다. 패배 원인을 변명하자면, 조이스틱 감도가 한국 오락실과 달랐다. 횡이동 등 미세한 움직임에서 약간 뻑뻑한 맛이 나는 한국 조이스틱과 달리 아키하바라 세가 조이스틱은 윤활유를 쉴 새 없이 발라놓은 듯 너무나 매끄러웠다. 원정 컨디션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것. 너무 매끄러운 나머지 방향 인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중요한 승부처 때마다 일격을 당했다. 일격으로 입은 정신적 데미지는 상당했다. 각종 스포츠에서 한일전 패배 후 바스러진 멘탈이 이런 걸까. 박지성 쉿 세리머니 하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됐다.


승패 결과에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는지 희진이는 도쿄인들과 재대결했다. 그는 무릎급은 아니나 웬만한 방구석 고수들을 다 쓰러뜨렸던 재야고수다. 그런데 이 녀석도 아키하바라에선 제 힘을 쓰지 못했다. 특히 조이스틱이 너무 미끄러워 방어가 제대로 되지 않는 변수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한 판을 겨우 이기면, 다음 판에 맥없이 무너졌다. 질척거릴 정도로 덤벼들어 겨우 1판(5판 3승제에서 최종승리)을 따냈다. 가까스로 체면치레했으나 분함은 가시지 않았다. 한국서 다시 붙자고 재대결 신청하고 싶은데, 이들이 올 일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더욱 분했다. 이를 바라보는 나 또한 씁쓸했다. 우리의 콧대를 눌러버린 승자들은 자신들이 한일전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니, 관심 없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상대방을 이겼을 뿐이니까.


쓰라린 패배를 오락실에 묻어두고 아키하바라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때운 뒤, 신주쿠로 넘어갔다. 역 근처 스타벅스에서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했는데도 아직 오후 3시. 시간이 남아돌았다. 뭐할까 고민하던 중, 얼마 전 인터넷에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성지순례글을 본 게 떠올라 검색했다.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가 신주쿠 일대를 배경으로 삽화를 그렸다는 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덕분에 뚜벅이처럼 주요 장소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돌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도쿄 여행을 색다르게 할 수 있었던 점에서 감사함을 느꼈다. 신카이 마코토, 고마워요.


크게 한 바퀴 돌고 나니, 자연스레 허기졌다. 신주쿠 밤거리를 배회하다 유명 라멘집에 방문해 돈코츠라면으로 둘째 날을 마무리했다. 벌써 다음날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신주쿠 유흥거리가 "우리랑 더 놀자"고 붙잡는 것 같았다.


2016년 마지막 날, 그리고 도쿄의 마지막 날. 이날 희진이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가장 많은 활동량을 자랑했다. 친절한 에츠코상 덕분에 체크아웃하면서 무료로 경차를 얻어타 센소지까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하루 뒤 다가올 2017년 새해에 좋은 일만 있길 기도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한국에서 온 남자 관광객 2명은 이 인파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센소지를 가볍게 둘러본 뒤, 집에서 부여받은 귀국 전 미션을 수행했다. 코드네임 도쿄바나나 공수작전. 잡화점 돈키호테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센소지 근방 가게를 방문했는데, 팔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고 멘붕에 빠졌다. 그러다 도쿄역 매장에서만 한정 판매한다는 또 다른 정보를 확인하고 도쿄역으로 내달렸다. 문제는 도쿄역이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여행후기로 남긴 사람들이 알려준 가게는 분명 구글맵에 나오는데,  도쿄역 미로는 끝없이 펼쳐졌다. 같은 곳만 계속 뱅글뱅글 도는 것 같다. "아노 도쿄바나나노 스토아와 도코데스까?"를 몇 번이나 물어봤는지도 기억나질 않았다. 말없이 묵묵히 따라다니는 희진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할 따름이다. 도쿄역 초행길이라 아임 트룰리 쏘리. 1시간쯤 돌았을까, 극적으로 도쿄바나나 가게를 찾았다. 도쿄 명물을 구매하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덕분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마리카를 즐기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애매하게 남아있긴 했으나, 무작정 도쿄역에서 죽치고 보내긴 아까웠다. 그래서 레인보우 브릿지와 대형 건담 보려고 오다이바로 발을 돌렸다. 멍 때리면서 바라본 전철 차창 밖으론 2016년 마지막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 해 마지막 일몰을 외국 땅에서 볼 줄이야. 오다이바에 도착해 놀이공원과 건담을 구경하고 나니 어둑어둑해졌다. 도쿄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마리카 타임이 온 것이다.

   


출국 전 운전면허시험장서 발급받은 국제 운전면허증을 써먹으려고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시나가와 지점에서 우리는 도쿄타워를 반환점 삼아 찍고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요시(나)와 스티치(희진)는 최대 시속 60km 짜리 고가트를 타며 도쿄 도로를 활보했다. 일반차량과 달리 전면 오픈되어서 그런지 체감속도는 더 빠르게 느껴졌다. 엑셀레이터를 밟을 때는 나도 루이스 해밀턴 못지않게 굉음을 내며 질주했다.


마리카 체험이 도쿄 내에선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긴 하다. 그런데도 이날 충분히 지나가는 일본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카트를 운전하는 요시와 스티치가 신기해 보였는지 핸드폰을 들고 사진 찍는 행인, 운전자들도 보였다. 반환점 도쿄타워에선 핫셀럽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마리카 일행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타인에게 주목받는 걸 즐겼다. 돌아오는 길은 롯폰기를 거쳐갔다. 롯폰기의 화려한 조명이 고카트를 감쌌고, 요시는 카트 스웩을 뽐냈다. 팬서비스로 요시의 거북이 등껍질 뱉는 쇼라도 보여줄걸 그랬나 보다. "2시간이 너무 짧아요, 아저씨 한 번 더요!" 외치고 싶었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도쿄에 오기 전에는 도쿄여행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쓰는 언어나 일부 문화들이 다르긴 하나, 서울과 유사한 큰 메트로폴리탄이었고 다이내믹하고 짜릿한 맛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치열한 철권 한일전과 포뮬러원을 방불케 하는 마리카가 인식을 바꿨다. 절친과 15년만 첫 동반여행, 도쿄, 나름 성공적.


2016년과 함께 도쿄는 안녕히 계시라, 우리는 2017년행 비행기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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