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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Jul 04. 2021

6. 방비엥의 밤을 점령한 사람들

2019년 6월 23일~26일 기록 재구성

2019년 4월 X일, 언제나 그랬듯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여름휴가 정하기' 시즌이 돌아왔다. 이번에도 최적의 날짜에 휴가를 쓰기 위해 직장 선·후배들과 눈치게임을 벌여야만 했다. 가장 인기가 많은 7, 8월 중으로 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시즌에는 맡고 있는 업무가 성수기라서 살짝 망설였다. 조금만 늦추면 추석연휴와 맞물릴 것 같아 이왕 일찍 다녀오겠다는 심산으로 6월 마지막 주로 정했다. 그 주에 생일도 껴있어서 나를 위한 생일선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경쟁률이 거의 1대 1에 가까웠기에 최종승낙이 떨어졌다. 이후 일하면서 어디로 다녀올까 틈틈이 검색해봤다. 다행히 이날 특별히 바쁜 일이나 외근 일정 등이 없어 재택하는 동안 편하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왕복시간을 고려해 비교적 만만한 동남아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동남아시아 여행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딱이었다.


비행기표를 열심히 검색하다가 라오스행 왕복티켓이 싼 매물로 나왔다. 라오스... 갈만한 곳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년 전 tvN '꽃보다 청춘'에서 유연석, 손호준, 바로가 라오스 방비엥을 다녀왔던 게 스쳐 지나갔다. 이거다! 어느 타짜보다도 더 빠른 손놀림으로 결제까지 신속하게 처리 완료했다. 예약이 끝난 뒤 라오스 6월 평균 날씨를 찾아봤다. 구글은 '우기'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어쩐지, 싸게 나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여행 날씨 요정'이라고 스스로 자부해왔기에 3박 4일간 비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다.


6월 23일 일요일 늦은 저녁, 비엔티안 왓따이 국제공항. 한국서 생일축하 파티를 해야 할 시간에 라오스에 있었다. 국제공항이나, 규모는 국내 공항과 비슷했다. 특히나 내가 타고 온 비행기 승객들 모두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귀엽게 굴러가는 라오어로 적힌 표지판들을 보지 못했다면 라오스라고 인지 못했을 것이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습한 공기가 반겼다. 여기 라오스 맞구나. 출발 전 예약한 밴을 타고, 3시간 거리에 위치한 방비앵을 향해 달렸다. 밴에는 나를 포함해 한국인 8명이 탑승했으나, 모두 피곤했는지 아니면 처음 본 동승자들에게 관심 없는지 말이 오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요함을 유지하려고 나도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며 음악만 들었다.



3시간 뒤, 방비엥. 나는 삼거리 앞에서 하차했다. 호텔 건물 사이에 놓인 길을 따라갔더니 불 꺼진 요금소가 등장했다. 블루라곤을 가려면 무조건 이곳을 거쳐가야 했다. 통행료를 내야 한다는 각종 여행 후기들과 달리, 깜깜한 밤에는 나를 붙잡거나 어디 가냐고 물어보는 이 한 명 없었다. 요금소를 통과하면 차 한 대가 통과할 만큼 아담한 사이즈를 자랑하는 나무로 만든 다리 하나가 등장했다. 원목이 주는 친근함인지 잔잔한 물소리를 내는 쏭강과 반딧불처럼 촘촘한 불빛들 때문인지 다리를 건너는 기분이 좋았다.


다리 끝에는 라오스 중년 여성이 차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신세 질 에어비앤비 호스트 나오쓰였다. 그녀는 방비엥에 온 걸 환영한다고 반갑게 맞아줬다. 나오쓰가 운영하는 방갈로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였다. 두 사람이 탄 차량이 내는 엔진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와 비교해도 손색없었다. 방갈로는 마치 숲 속에 위치한 것처럼 주변이 무성한 풀과 나무들이 가득했다. 건너편 방갈로에는 독일에서 온 커플이 비어라오를 몇 병 마셨는지 시뻘건 얼굴로 인사했다. 그들은 내일 떠난다며 잠깐 스몰토크를 나눴다. 방비엥 1일차는 이렇게 끝났다.


다음날 아침, 매일 6시에 일어나는 루틴이 몸에 뱄는지 일찍 눈을 떴다. 창문을 열어젖히며 라오스의 아침 공기를 맞이했다. 어젯밤처럼 습했다. 창문 아래엔 흰 오리들과 점박이 닭들이 떼를 지어 모여있었다. 방갈로 옆에는 나오쓰가 운영하는 식당이 붙어있었다. 조식 무료 제공이 문득 떠올라 스크램블 에그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웠다.


아침 식사 후, 방비엥에 온 유일한 목적 블루라군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사실 나오쓰의 숙소를 잡은 이유도 블루라군으로 가기 좀 더 편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방갈로 길 맞은편에는 버기카와 바이크 렌털샵이 있었다. 스쿠터 한 대를 대여한 뒤, 시트 내부에 구성된 트렁크에 물놀이 후 닦을 스타벅스 비치타월을 넣어뒀다.


블루라군 1은 숙소로부터 5km 가량 떨어져 있었다. 스쿠터를 타고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비포장도로라서 속력을 올릴수록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기도 했으나 스릴이 넘쳤다. 옆을 지나가는 버기카 행렬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출발한 지 15분가량 됐을 때, 블루라군 1 입구가 보였다. 아직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전이라서 그런지 소수의 인원만 보였다. 나이스!


소문대로 블루라군의 물은 투명한 에메랄드색이었다. 라군 위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물 쪽으로 기울어진 거대한 고목이 붙어있었다. 고목에는 사람들이 재밌게 물놀이를 즐기라고 튼튼한 가지에 다이빙대가 설치됐다. 낮은 가지 아래에는 물에 반 이상 잠긴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혹시나 다이빙하다 다칠 수도 있으니 안전유의하라는 안내판이 부착됐다. 영어, 라오어, 그리고 한국어로. 한국사람들이 많이 방문한다는 걸 안내표지판에서 실감했다. 블루라군에서 노는 동안 한국인 관광객만 수도 없이 봤다. 짧게 즐기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패키지 관광객들, 친구들과 우정을 다지러 삼삼오오 놀러 온 그룹 등등.


수영복도 입었고, 구명조끼도 대여했으니 신나게 물놀이 타임. 그런데, 누가 내 다이빙 영상 찍어주지? 고프로로는 부족한데. 여러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툭툭 건드렸다. 현지인 여성이 "알 유 코리안?"이라고 말을 걸어왔다. 여행객 티 안 내려고 일부러 허름하게 입었는데, 현지인 눈을 속일 수 없지. 당연히 외국인으로 보였을 테니까. 멍청했다. 아, 한국인이냐고 묻던 친구 이름은 타르다.


타르 : 혼자 놀러 왔어?
나 : 응, 휴가차 혼자 블루 라군 왔어.
타르 : 그래? 그럼 내가 찍는 거 도와줄까?
나 : 나야 땡큐지!


타르 덕분에 다소 심심할 뻔했던 블루라군 물놀이가 재밌었다. 마음껏 다이빙하고 고목에 묶인 손잡이에 매달리며 유격훈련 외줄도하 흉내도 냈다. 반대편에는 제법 긴 구간의 미끄럼틀도 설치되어있어 이 또한 즐겼다. 물놀이에 지쳐 잠시 오두막에서 쉴 때쯤 스콜이 쏟아졌다. 기막힌 타이밍. 잠시 스콜을 피할 겸 근처 식당에서 카오삐약을 먹으며 몸을 녹였다.


블루라군 2, 3까지 가보고 싶었으나, 타르는 스쿠터 타고 갔다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거리도 매우 멀고 비포장도로라 만류했다. 게다가 현지인 피셜 2는 흙탕물 수준이 됐고, 3는 관광객들을 위해 너무 인위적으로 만들었고 비싸단다. 로컬 주민 말에 조용히 따랐다. 그러면서 블루라군 1에서 가까운 남싸이 전망대를 추천해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남싸이 전망대의 정체(?)를 몰랐다.



스쿠터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남싸이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전망대 오르는 길이 거의 등산 수준이었다. 블루라군 하나만 생각하고 샌들, 수영복 바지, UMF 굿즈 반팔로 물놀이 룩을 맞췄는데, 등산이라니. 전망대에 어울리지 않은 OOTD였고 자연스레 산모기들의 손쉬운 타깃이 됐다. 전망대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내 다리는 성한 곳 없이 모기들에게 물려 뜯긴 흔적만 가득했다.  


강제 헌혈당한 고통은 남싸이 전망대가 선사한 전경을 보며 싹 잊어버렸다. 광활한 녹색 평야와 숲, 뒤로 펼쳐진 산들이 아름다웠다. 이래서 타르가 남싸이 가자고 강력 추천했구나. 전망대 반대편에는 라오스 국기를 등지고 오토바이 한 대가 홀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사진 찍는 스폿이라고 알리는 듯했다. 덕분에 훌륭한 인생사진을 건졌다.


타르에게 저녁에 뭐하냐고 물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해서 방비엥 마을도 구경할 겸 같이 저녁을 먹자고 약속을 잡았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한 뒤, 1시간 낮잠을 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오쓰는 어디 가냐고 물어보길래 방비엥 시내로 나간다고 답했다. 그녀는 친절하게 태워주겠다고 말했으나, 정중히 거절했다. 중심가까지 걸어가면서 방비엥의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이곳 풍경은 분명 한국과 다른 낯선 이미지인데도 친숙함이 느껴졌다. 자유로이 풀을 뜯어먹는 소들, 포장도로를 활보하는 누렁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어디론가 뛰어가는 아이들, 자전거와 스쿠터 등을 타고 지나가는 성인들. 목가적인 분위기가 닮아서였을 것이다.


라오스 자연을 감상하다 보니 어젯밤 건넜던 다리를 다시 만났다. 해질녘 방비엥 시내는 사람들 소리로 가득 찼다. 투어를 마친 관광객들을 실은 트럭들은 그들을 숙소로 데려다 주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트럭에서 내리는 관광객들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한국인들을 겨냥해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노포들 상당수는 한국어 메뉴판과 호객 문구를 내걸었다. 심지어 백종원이 극찬할 것이라고 패기를 드러낸 곳도 있었다. '히피들의 안식처'라는 별명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타르가 저 멀리서 다가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타르와 함께 온 사람은 자신을 허니라고 소개했다. 세 사람은 라오스 전통음식으로 저녁을 먹은 뒤, 방비엥에서 유명한 클럽 사쿠라 바로 옮겨 술 마시기로 했다. 클럽 입구에는 보트 파티 티켓 부스가 있었다. 보트 파티를 즐긴 이들 후기를 보면, 절대 후회 안 할 것이라는 추천글이 대부분이었다. 타르 일행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했으나, 입장료 26만 낍(약 3만 1천 원)이 너무 비싸다며 거절당했다. 이들의 체감물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혼자 다음날 티켓을 구입했다. 


여기서부터 보이지 않은 균열이 시작됐다. 완전 다른 관심사, 생각, 상대방의 대화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만 했다. 게다가 짧은 영어 구사 대 브로큰 잉글리시가 빚어낸 소통의 한계와 귓가를 쉴 새 없이 때려 박는 클럽음악도 방해가 됐다. 결국 2차를 가자는 말을 뒤로 한 채 폭풍우를 뚫고 방갈로로 돌아왔다. 


다음날 오후 1시, 전날 밤 화려하고 현란한 조명 아래서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몸을 흔들던 사쿠라는 없었다. 클럽 내부는 뜨거운 햇빛이 대신 자리했다. 나를 포함해 보트 파티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한국인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경기도 가평 방비엥 마을에 온 게 틀림없어.


같은 인종, 같은 언어를 쓰긴 하나 서로 서먹서먹했다. 차 여러 대에 나눠 타 보트로 이동할 때 간단한 스몰토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긴 했으나 몇 시간 동안 함께 할 사람들이니 형식상 오가는 말처럼 들렸다. 이날 보트 파티에 참여한 이들 면면이 제법 화려했다. 중년 부부 한 쌍과 오랜 동네 친구 사이를 유지한 남자 둘, 라오스를 배낭여행 중인 두 남자, 대학교 친구라고 소개한 남자 둘과 여자 둘, 칠곡 패밀리로 일컫는 여자 5명, 군무원 1명, 그리고 나.


선착장에 대기 중인 보트에 17명 모두 탑승을 마치자, 보트는 남늠 호수로 나아갔다. 보트가 큰 편은 아닌데, 파티에 적합한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미니바와 미니 뷔페, DJ 시설, 테이블 축구 게임기까지.


출발할 때도 보트 안 공기는 어색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단번에 깨뜨리는 데에는 술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마침 매우 손을 탄 주루마블 보드판도 있었다. 술자리 게임을 즐기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한국인이 누구였던가, 흥의 민족이자 주류 게임에 절대 빼지 않는 사람들 아니었던가. 주루마블을 시작하자마자 삽시간에 맥주와 소주, 칵테일 등이 가득 채워졌다. 술이라는 녀석의 기운이 참으로 어마무시했다. 잠시 정착할 때는 구명조끼를 입고 호수로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겼다. 서쪽으로 향하는 해를 배경 삼은 남늠 호수는 무척이나 예쁘고 아름다웠다. 이것이 유유자적인가 보오. 


반나절 만에 보트파티 멤버들과 절친이 됐다. 이 훈훈하고 끈끈한 분위기는 뒤풀이 자리인 삼겹살 파티로 이어졌다. 고기 반 술 반으로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워 사쿠라 바로 향했다. 전날과 달리 클럽 내부에 큰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았다. 부어라 마셔라 하다가도 메인 스테이지 위에 올라가 단체로 점령하기도 했다. 특히 '강남스타일', '삐딱하게' 등 아는 노래들이 나오자, 그때만큼은 싸이, 지드래곤 K팝 스타에 빙의됐다. 덩기덕 쿵더러러 얼쑤! 그래서였는지 BTS 못지않은 주목도를 받았다. 흥의 민족이 여러 명 뭉쳤을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줬다. 그날은 우리가 방비엥 밤을 접수했다.


정신없이 놀다 언제 숙소에 들어왔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떠나는 날도 잠시 까먹을 만큼 신나게 놀았다. 벌써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다니. 이래서 휴가는 눈 깜빡할 새 지나가고 순삭된다고 하지. 짧지만 좋은 인연들을 만난 게 라오스 여행에 큰 기쁨이었다. 역시 여행의 묘미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쌓기다. 그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파서 단톡방도 만들었고, 여행 끝난 직후 서울 신촌서도 만났다. 이제야 전하는 한 마디, 만나서 즐거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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