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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Sep 29. 2024

13. 유럽여행에서 가장 운수 좋은 날

2012년 8월 2일 기록 재구성

MBTI 식으로 모든 상황을 분석하는 트렌드에 맞춰, 나의 여행 스타일을 소개해본다. 평소에는 J이나, 여행할 때만큼은 극강 P형. 낯선 곳으로 떠나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오는 변수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게 되면, 출발 전에 딱 2개만 예약해 둔다. 왕복 비행기, 그리고 잘 곳. 그 외에는 현지에 도착한 다음 천천히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면서 러프하게 일정을 정한다. 이것이 나의 여행 스타일이다.


처음부터 P형처럼 다니진 않았다. 1달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만 하더라도, 유럽 왕복 비행기와 유레일 패스 모든 구간 및 숙소,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한 주요 스팟 입장료 등 일정의 A to Z에 예약이 필요한 곳은 미리 예약하고 다니는 파워 J 그 잡채. 여행 중반까지 문제없었으나, 운수 좋았던 어느 하루로 인해 바뀌었다.





2012년 8월 2일, 유럽 배낭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 프랑스 니스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이동하는 코스인데, 간단한 비행기 직항이 아닌 기차 2회 환승으로 이동시간만 무려 10시간. 특히나 환승 대기 시간도 조금 타이트한 감도 있어 한 번이라도 놓치게 될 경우, 노숙도 해야 하는 상황.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겠지만, 설마 무슨 일 있겠냐며 럭키비키 마인드로 니스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탑승했다. 12시 9분 니스에서 출발한 기차는 4시간가량 걸려 몽펠리에에 도착한다. 렛츠고 몽펠리에. 




오후 12시 13분, 니스 빌역.


예정 시각보다 4분 정도 늦게 몽펠리에행 기차가 출발했다. 니스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속력을 점점 올렸고, 2박 3일간 천국처럼 즐겼던 니스와 도시가 품은 푸른 바다에게도 작별을 고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을 머리와 가슴속에 저장해 두었다.


니스를 빠져나간 뒤,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어느새 영화인들의 성지 깐느를 지났고, 창 밖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지중해가 푸른빛의 수평선을 계속해서 생성하고 있었다. 출발한 지 한 시간쯤 됐을 때, 첫 번째 정착지인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파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 세계 3대 항구. 유럽 배낭여행 최초 계획에 포함됐던 후보군이었으나, 1달이라는 한정된 기간이 발목을 잡아 결국 최종 선정에서 제외된 바 있다. 아쉽지만 잠시 정차했던 마르세유 생 샤를 역과 기차를 타고 지나가는 그 순간을 통해서 마르세유의 모습을 두 눈으로 담았다. 생 샤를 역에서 출발한 것을 확인한 뒤에는 눈이 스르르 감기면서 잠들었다.




오후 2시 30분, 프랑스 이름 모를 작은 기차역.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기차는 이름 모를 시골 작은 역에 정차한 상태. 잠시 정차하는 역이겠거니 생각하고 노트북 전원을 켠 다음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에 한창 몰입하면서도 드문드문 창 밖을 바라봤는데, 정지화면처럼 바뀔 생각이 없어 보인다. 기차가 왜 출발하지 않는 거지? 승객들은 자유롭게 기차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반복했다. 이때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프랑스어로 전달해서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기차 밖으로 나와봤다. 일부 승객들은 스트레칭하거나 작은 역 매점을 가거나 플랫폼에서 흡연을 하고 있었다. 기차 승무원으로 보이는 두세 명의 남성은 열차 아래 부분을 열어놓고 무언가 진지하게 대화했다. 아, 기차가 고장 난 거구나!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이건 예정에 없던 시나리오인데? 자칫 제 시간 안에 몽펠리에 역에 도착하지 못해 다음 기차를 놓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 야외취침해야 돼? 말로만 듣던 기차 노숙?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20분 뒤, 기차 밖에서 돌아다니던 승객들이 다시 탑승했다. 프랑스어 안내방송과 함께 기차가 다시 출발했다. 고장 난 부분 고쳤나 보다. 살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오후 3시 반. 4시 38분 전까지만 도착하면 된다. 탈 수 있다, 탈 수 있다, 탈 수 있다.. 나 자신에게 무한 세뇌를 걸었다. 




오후 4시 38분, 종점 몽펠리에 생 로크 역 도착.


누구보다도 재빠르게 짐을 챙겨 들어 기차에서 내렸다. 혹시나 환승해야 할 기차가 출발했는지, 플랫폼 중앙에 부착된 전광판을 확인했다. 내가 타야 할 포르트부행 기차는 이미 떠났을까. 거짓말처럼, 아직 도착 전이다! 하늘이 날 버리지 않으셨구나!! 포르트부행 기차 옆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PORTBOU - DELAY

심지어 연착이었다! 다음 기차를 여유롭게 탈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인데, 또 다른 걱정이 찾아왔다. 포르트부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고속열차로 환승해야 하는데, 과연 탈 수 있을까? 이놈의 걱정지옥, 아직 안 끝났다.



오후 5시, 연착됐던 포르트부 행 기차에 무사히 탑승하여 몽펠리에에서 출발.


첫 번째 열차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을 실은 이 열차는 지금은 사라진 비둘기호, 통일호에 비견되는 매우 느린 속도로 달렸다. 아무래도 포르트부로 가는 노선이 피레네 산맥을 피해 돌아가는 코스이다 보니 매우 구불구불했다. 


조심스레 달리는 기차 차창 밖으로는 지중해가 어느새 노을을 머금었는지 연파랑과 연보라 그 사이의 파스텔톤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기차가 달리는 서쪽 방향으로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경치는 매우 아름다운데, 여전히 나는 안절부절. 다음 기차 출발 예정 시각인 7시 30분까지 도착할 수 있기를 간절히 비나이다 비나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통과하고 조금씩 포르트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7시 30분을 넘어섰다. 제발 탈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안 그러면 포르트부에서 하룻밤 묵을 장소를 급하게 찾아야 한다. 예상과 벗어나면 멘탈이 흔들리는 J형은 포르트부로 가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다.




오후 7시 50분, 스페인 포르트부 역.


기차가 멈추기 전, 창밖을 봤더니 빨간색으로 뒤덮인 고속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설마, 저 차량이 내가 탑승할 바르셀로나행 기차일까? 제발 그 기차여야만 해. 간절한 심정을 안고 재빠르게 하차했다. 


플랫폼에는 턱수염을 기른 한 남성 직원이 웃으면서 포르트부에 도착한 사람들을 반겼다. 나는 바르셀로나행 티켓을 보여주며 혹시 저 빨간색 고속열차가 맞는지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맞다. 저 차가 바르셀로나로 가는 막차다. 당신 운이 매우 좋다"며 웃어 보였다. 이 열차 또한 내가 탑승했던 기차가 연착된 여파로 출발 시각이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럭키 가이다, 하하하!


바르셀로나행 고속열차에 탑승하고 예약한 좌석에 앉자, 그제야 걱정지옥에서 벗어났다. 정말 아찔했던 반나절이었다고 되돌아보면서 나중에 가족, 친구, 지인 및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영웅담처럼 두고두고 들려줄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탄생했다고 혼자 뿌듯해했다. 




오후 9시 52분, 바르셀로나 산츠 역.


험난했던 기차 여정의 종점인 바르셀로나! 비록 기차 고장과 연착이라는 엄청난 변수에 오는 내내 고통받았지만, 아무런 사고 없이 바르셀로나까지 와서 해피엔딩이었다. 


오는 내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극도로 긴장하고 스트레스받다 보니 배가 고팠고,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전방에 가장 만만한 맥도날드가 눈에 띄어 뒤도 안 돌아보고 입장. 그동안 맥도날드서 1유로짜리 햄버거나 2유로짜리 치킨버거로 연명했는데, 오늘은 조금 사치를 부려 빅맥세트를 주문해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오후 10시 35분, 호화만찬을 마치고 미리 예약해 둔 한인 게스트하우스로 이동할 차례. 게스트하우스는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 역 바로 앞에 위치해 지하철로는 9분 거리. 거리도 가깝네, 좋다. 지하철에 탑승한 뒤, 배낭을 걸터앉고 봉을 등받이 삼아 편안하게 이동했다.


산츠 역에서 출발해 두 번째 역에 도착했을 쯤이었나. 건장해 보이는 남성 5명이 탑승하여 봉을 등받이 삼아 배낭에 앉아있는 내 주변을 둘러쌌다. 다섯 친구들이 유독 내 뒤통수 쪽에 있는 지하철 노선도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보니 나 또한 자연스레 '뭐가 있나?'라고 시선이 따라갔다. 순간, 오른쪽 바지 호주머니 속으로 정체불명의 손이 들어왔다.


이 놈들 소매치기구나!


딱 달라붙는 7부 바지였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검은손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왼쪽 호주머니에는 여권, 오른쪽 호주머니에는 핸드폰이 들어있었다. 하마터면 대형 참사가 날 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그놈의 손목을 잡아채고, 왼손으로 강하게 손날치기를 날려 제압했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받아 놀랐는지, 소매치기 5인조는 다음 역에서 우르르 내리면서 도망쳤다. 나와 같은 칸에 있었던 다른 승객들도 이들의 요란스러운 후퇴를 보고 나서야 소매치기 일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나에게 걱정스러운 눈과 함께 "Are you okay?"라고 물었다. 이에 의기양양하게 "No problem"이라고 어깨를 들썩였다. 내가 바로 소매치기를 퇴치한 코리안이라네, 엣헴.


한바탕 소통이 지난 뒤, 사그리아 파밀리아 역에 안전하게 하차했다. 게스트하우스가 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여서 그리 헤매지도 않았다. 밤 11시쯤 다 되어서야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을 완료하고 짐을 풀었다. 샤워하고 침대에 누우면서 엄청나게 운수 좋았던 오늘 하루를 반추했다. 유럽 배낭여행, 아니 내 인생의 여행 중 가장 운수 좋았던 하루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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