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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Aug 06. 2021

내가 롤모델 삼은 '특별한' 사람들.zip

사회생활하다가 종종 꺼내보면서 참고한다

사진=marketing91.com


롤모델(role model), 혹은 역할 모델. 한국에선 롤모델이라는 명칭이 더욱 익숙하다.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K. 머튼이 처음 사용한 이 단어는 "어떤 한 사람을 정해, 그 사람을 표본으로 정하여 성숙할 때까지 모델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이다.


너의 롤모델이 누구냐고 물으면 답변은 각양각색이다. 가장 최측근인 부모님부터 시작해 자주 왕래하는 친구들, 멀리는 유명인이나 공인, 위인, 가상 인물까지 롤모델이라는 집합에 들어가는 이들이 광범위하다. 롤모델 삼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 매력, 나에게 없는 면 등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겠다.


나도 롤모델이 있다. 다만 나의 롤모델 리스트에는 부모님도, 친구들도, 존경할 만한 위인 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래서 남들이 흔히 생각하는 롤모델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사람들' 이름을 하나 둘 명부에 작성하고 있어서다.


특별한 롤모델들을 찾기 시작한 계기는 사회생활하면서 종종 마주치는 빌런들 덕분이었다.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사이라면 가볍게 패싱하면 되는 일이나, 계속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이라면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일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그들 때문에 동시에 불편함과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도 맞이한다. 그래서 살생부처럼 이름을 적어나갔다.


사진=마이크임팩트


2015년 청춘페스티벌에서 유병재가 비슷한 말을 남겼던 적이 있다. 그는 살면서 유용한 팁을 이야기하겠다고 해서 자신만의 멘토를 설정하는 방법을 공유했다.


"예전에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어른들을 찾아뵙고 힘든 점을 말씀드렸다. 대부분 이해한다며 '다들 그래'라고 위로해줬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들 그렇다'는 얘기에 거부 반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멘토를 설정하는 방법을 다르게 했다."

"굉장히 훌륭하신 분들도 많지만 그런 분을 멘토로 삼지 않는다. 그분을 따라 하려고 해도 결국 본성이 나오더라. 그래서 반대로 무례하고 버릇없고 쓰레기 같은 사람을 보면서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그게 훨씬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보통 플러스가 되려고 많이 노력하는데 마이너스만 없애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유병재-


유병재 말마따나 훌륭한 사람들을 따라 하려고 해도 본성을 바꾸기까지 쉽지 않다. 유병재는 과거 유재석을 만나면서 옆에서 지켜본 인품과 훌륭한 면을 1주일간 따라 해보려 했으나 본모습이 계속 튀어나오는 바람에 결국 포기했다고 밝혔다. 격하게 동의한다. 그들의 행동과 성격이 내 것이 아니니까.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롤모델을 설정하기 시작한 시기는 3년간 장교로 군 복무했던 시점부터였다. 다른 남성들보다 군 입대가 늦었다. 고시 때문에 연기하던 중 학교 졸업을 앞두고 운 좋게 학사장교로 합격했고, 3개월간 군인화-장교화 단계를 거쳐 6월 말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다 상무대로 넘어가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초군반 교육을 이수한 뒤, 경기도 북부에 위치한 부대로 자대배치받았다.


그곳에서 군 생활하면서 만났던 일부 선임이나 상관, 후임, 부사관 등 톤 앤 매너가 불편하게 만들었다. 언제 폭발할지 예측할 수 없는 욱 폭탄형, 별로 중요치 않거나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을 야근으로 질질 끄는 답답형, 어떻게든 농땡이 칠까 궁리만 하며 주변에 폐 끼치는 유형, 소름 끼칠 만큼 극과 극 두 얼굴을 가진 사람, 권위로 찍어 누르려는 사람 등등.


지금도 강렬하게 뇌리 속에 박힌 인물들이 몇몇 있다. 먼저 연대 작전장교로 보직변경을 앞두고 있던 A가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욱 폭탄형+답답형을 합쳐놓은 유형이다.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욱함에 부하들이 항상 눈치 봐야만 했고, 매번 쉬운 걸 어렵게 해결하려는 바람에 언제나 야근은 필수. 퇴근 후에도 시달렸다. 종종 초급장교들 붙잡고 강제 술자리를 가지는데, 언제나 끝까지 달려야 했다. 곱게 숙소 복귀할 리는 만무했다. 그렇게 술을 진탕 마신 다음날에 A는 매번 제때 출근 못하고 지각했다. 이러한 패턴이 계속 누적되니 그의 몸에선 언제나 오래 찌든 술담배 냄새가 고약한 향수처럼 풍긴다. 영관장교 진급심사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지.


A에게 술로 호되게 당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부대 인접 마을에서 늦은 저녁을 먹던 중, A의 레이더망에 걸려 강제 술자리가 결성될 상황이 몰린 것. 다행히 나는 술만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홍익인간이었고, 이를 이용해 취했다고 무사히 빠져나갔다. 그러나 같이 밥을 먹던 일행 중 두 명은 끝까지 붙잡혀 동틀 때쯤 들어왔다. 정말 닮아선 안되겠다는 결심이 서 A를 1번으로 등록했다.


사진=tvN '재밌는 TV 롤러코스터 2'


대대 주임원사로 머물렀다가 이웃 대대로 전출된 B도 특별한 롤모델 리스트에 있었다. 허허실실 웃으면서 오랜 세월 쌓은 군 경력과 연륜으로 자기보다 높은 계급인 젊은 장교들을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자신보다 계급 낮은 부사관, 일반병사들에겐 존중은 1도 없이 하대했다. 그러다 상관이 보는 앞에선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부하들에게 급 인자한 척을 했다. 그러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지휘관 허락 없이 조기 퇴근으로 사라졌다.    


그런 B와 적잖은 트러블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화 하나 털어놓자면, 내가 당직사령을 설 때였다. 초저녁이었다. 상황병 한 명이 전화를 받았다. 크게 혼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당직사령님, 어느 간부님이 전화 바꾸라고 합니다"고 수화기를 건넸다. 받아보니 B였다. 상황병에게 대뜸 "높은 간부 바꾸라"고 소리친 모양이었다.


B가 전화한 이유는 초과근무 승인 때문이었다. 그는 취사장에서 초과근무를 했다며 미처 종료 버튼을 못 누르지 못하고 퇴근했다면서 승인 요청을 한 것. 취사장서 저녁 먹는 동안, B를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농땡이 전력을 알기에 취사장에 전활 걸어 교차 확인에 들어갔다. 역시 B는 거짓말했다. 그는 취사장에 한 번도 방문하질 않았다. B의 거짓말의 대가로 나는 초과근무 승인을 거부하며 응수했다.   


전역 전 모셨던 연대장 C도 롤모델이었다. 3차 진급 대상자였던 C는 인자하고 덕망 높은 리더처럼 보였다. 그러나 직속 참모들을 비롯한 부하들을 티 나지 않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지시로 곤란케 했다. 주말 저녁에 참모 간부들을 긴급 소집한 이유가 저녁식사 제안하기 위해서였고, 일부 초급간부의 경제권을 통제하고 직접 관리하기도 했다. 이 초급간부들이 자기관리하지 못한 점이 문제이긴 하나, 그들의 월급과 통장에 함부로 손대는 건 확실한 월권행위. 또 종종 무례한 발언으로 불편한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연대로 차출하기 전 C의 면담 자리가 있었다. 체력단련 시간이었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부대 한 바퀴를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대장이 갑자기 나를 찾았다. C의 호출이었던 것. 연대장실에 들어서기 전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연대장님 OOO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라고 알렸다. C는 들어오라고 답했다.


믹스커피를 조용히 마시던 중, C는 "아버지는 뭐하시냐"고 물었다. 당시 아버지는 대기업 부장으로 계셨다가 정년퇴직 대신 하청업체 중소기업 사장을 맡으면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셨다. 집안 사정을 C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싫어 간단하게 "중소기업 사장"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C는 갑자기 아버지의 월급을 물었다.


왜 이런 걸 묻지? 아무리 곱씹어봐도 아버지를 얕보는 듯한 발언이다. 그러면서 C는 자신이 훨씬 더 대단하다는 식의 뉘앙스로 말을 이어갔다. 나의 부모님을 면전에서 깎아내리면서 자신을 치켜세우는 그 태도, 참을 수 없었다. 대뇌의 전두엽 뉴런까지 전해지는 불쾌함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휘관 앞에서 대놓고 싫은 기색을 낼 순 없는 일.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에 한껏 힘을 준 채, 멋쩍은 미소로 넘겼다. 지금 돌이켜봐도 불쾌한 자리였다. 


사진='데스 노트'


민간인 신분을 얻어서 나온 사회도 군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 법.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면 대응하면서도 조용히 롤모델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의 행동을 계속 되뇌며 이들처럼 최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끼치거나 상처주진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이 특별한 롤모델은 사회생활하면서 제법 쏠쏠하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이성의 끈이 끊어질 법한 상황이 올 때마다 롤모델 리스트는 등장해 나를 말리고 설득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도록 이끌었다. 롤모델들을 생각한 뒤에는 불같이 끌어올랐던 몸과 마음이 냉정하고 차분해졌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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