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본방사수 시작했던 '애드버킷'이 불러온 나비효과
어릴 적 학교에서 작성한 장래희망을 실제 이뤄냈다는 성공담을 접하면 매번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느낀다. 내가 되고 싶은 장래희망을 종이 한 장에 적어낼 때는 매우 쉬울 것 같았는데, 인생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그 때문에 현실적 한계라는 높은 벽에 부딪치거나 혹은 저마다 다른 사유로 다른 방향을 선택한 이들이 일반적이다.
나 또한 그랬다. 지금은 글 쓰고 있는 일을 하면서 생업을 유지하고 있으나,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 번도 생각지도 않던 선택지였다. 그전까지는 법조인을 목표로 일방통행 직진을 외쳐왔다. 이를 위해 법대 진학해 고시 준비, 및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신입생 때 개강총회가 떠올랐다. 당시 한 선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여러분들은 왜 법대에 오게 됐어요?"
그중 일부는 매체를 통해 접한 법조인들의 모습에 반했기 때문에 이 길을 택했고, 여기까지 왔다고 답했다. "검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한 동기들은 '공공의 적 2'가 영향을 끼쳤다더라. 특히 이 사람, 강철중(설경구).
'공공의 적'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2편에서만 검사로 등장한 강철중. 1편보다 캐릭터가 단면적으로 그려져 매력이 반감됐긴 하나, 이상적인 검찰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낸 작품이었기에 검사를 꿈꾸는 이들에겐 닮아도 좋을 교과서였다.
나는 조금 달랐다. '공공의 적 2'도 아주 약간 감명받긴 했으나,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한 드라마를 보면서 "바로 이거야"라고 외쳤다. 1998년에 MBC에서 방영했던 '애드버킷'.
자아의식이 있다고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턴 장래희망란에 다양한 직업군을 기입했다. 확실한 목표 없이 갈대처럼 '이랬다 저랬다'였다. 하루는 축구 국가대표가 돼서 월드컵에 출전해 트로피를 거머쥐겠다고 포부를 드러내다가 다른 날에는 대한민국 미래를 이끄는 전도유망한 과학자가 되겠다고 바꿨다. '경찰청 사람들'에서 경찰들의 활약상에 감동받았을 때는 경찰을 적었다가, TV서만 보던 대선 후보들과 악수를 한 뒤에는 청와대에 들어가는 것도 꿈꿨다.
그러던 중 '애드버킷'을 우연히 시청하게 됐다. 드라마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사법연수원생 김민규(손창민)가 우연한 계기로 허름한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가 돼 정의구현하는 내용이다. 요즘에는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법정물이 많이 나와 대중에게 익숙해졌으나, 뻔한 사랑하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뤘던 그 당시에는 '애드버킷' 같은 작품은 거의 드물었다. 그 점에서 러브라인에 살짝 질려있던 우리 가족의 선택을 받았던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김민규의 활약상. 사법고시 수석 합격할 만큼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가 강한 정의감과 의뢰인에게 적극 헌신하면서 이익을 좇는 대형 로펌과 법정에서 맞붙어 승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회로 나오면서 김민규 같은 케이스처럼 성장하는 게 대단히 어려운 것도 이후에 알게 됐지만. 김민규와 대척점에 서서 고객의 이익 때문에 손에 더러움을 묻히며 정반대길을 걸어야 했던 오준성(전광렬), 김민규 못지않게 불의를 참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특수부 검사 장혜미(송윤아) 등도 눈에 들어왔다. 또 법조계에서 꾸준히 지적받았던 전관예우를 비판하고 “영어를 읽고 쓰는 것뿐 아니라 고객과 직접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해 당시 법률 서비스 시장의 현실 및 로펌들의 생존 전략을 실감나게 그려낸 점이 사로잡았다.
'애드버킷' 여파로 부모님 세대에선 아역배우 출신 청춘스타, 우리 또래엔 '신돈아재'로 각인됐던 손창민이 나에겐 '멋진 변호사'로 뇌리 속에 강렬하게 박혔다. 손창민의 열연 덕에 1999년부터 장래희망란에 법조인(검사 혹은 변호사)이라고 한결같은 태도를 취했다. 이때부터 김민규 같은 사람이 되자고 법대를 진학해야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설정하기 시작했다.
계속 "법대 가겠다", "법조인 되겠다"고 떠들어대는 아들을 본 부모님은 굳이 힘든 길을 선택하냐며 만류했다. 그러면서 안정적인 꿈을 정하라고 권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처럼 보였을 테니까. 대학 진로를 정해야 할 고3 때 사소한 갈등을 유발했던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으나, 꾹꾹 눌러담았다. 보란 듯이 잘 되는 모습을 보여주겠노라고, 내 말이 옳았음을 증명하려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결국 내가 계획한 대로 기어이 법대 진학에 성공해 내 승리로 끝났다. 아니 끝나는 듯 보였다. 잠깐의 승리에 한껏 도취됐을 때는 고시라는 훨씬 더 강력한 대항마의 존재감을 얕보며 꽃길만 걷는 일만 남았다고 착각했다. 이후 굳건했던 의지와 기세가 확 꺾일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만.
요즘 손창민은 악역 끝판왕, 혹은 소탈한 아버지나 아저씨 캐릭터로 종종 얼굴을 비추고 있다. 그를 볼 때마다 가끔 옛날 생각을 한다. 패기 충만했던 남자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