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의 아오이처럼 그는 그녀를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지금으로부터 십 년 뒤에 남산타워에서 만날래?”
남자는 말했다.
“십 년 뒤, 남산타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여자는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남자가 당연하게 ‘그래!’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아니면,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채던가. 그런데 남자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자가 다음 말을 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요즘 무슨 책 읽고 있는지 알지?”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고 재빨리 여자의 옆 의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가방과 그 앞에 놓인 작은 책 하나로 시선을 옮겼다.
오렌지 색의 얇고 작은 책에 흰 글씨로 쓰여 있는 제목은 <냉정과 열정사이>였다. 남자는 그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최근 인터넷에서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끈 이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읽어 본 적이 있는 듯했다.
남자는 시선을 여자에게 돌리고는 답했다.
“알지, 그럼. 냉정과 열정사이! 일본 소설이잖아.”
여자는 역시 원했던 대답이 아니어서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읽어보지는 않은 거구나. 내가 한 달째 같은 책을 들고 다니는데, 한 번쯤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아, 그래 미안해.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빌려서 꼭 읽어볼게!”
남자의 당황한 표정과 말투에 여자는 마음이 풀렸다. 언제나 자신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이 다르다고 어리게 보거나, 무시하지 않는 사람. 센스는 조금 부족하지만, 늘 자신이 하는 말에 귀기울 여주고,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서, 그렇게 자신을 세상 최고로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이라서. 여자는 남자가 지금 이 열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데, 시간이 지나 냉정이 찾아왔을 때에도 자신의 곁을 지켜줄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소설 속 아오이처럼 남자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안 읽어도 괜찮아. 그냥 나는 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너와 약속을 하고 싶을 뿐이야. 소설 속 주인공은 우리처럼 대학을 다니면서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어. 그리고 그 둘은 10년 뒤, 여자 주인공의 생일날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 둘은 중간에 헤어졌지만, 결국 10년 뒤 약속한 그 날 만나서 사랑을 나눠. 그리고 그 뒤로 둘은 다시 제각기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지.”
여자는 눈을 반짝거리며 소설 속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사랑스러웠다. 무언가를 늘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고민도 많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할 때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재미있는 것을 하기로 상상할 때 세상 누구보다 순수한 웃음을 보이는 사람. 항상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 남자는 여자가 그런 사람이라서 좋았다. 여자를 보고 있으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오~ 좋아! 그럼 우리도 10년 뒤에 만나자. 어디서 만날까? 소설 속 주인공처럼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날까?”
여자는 미간을 찡그리며 한 손가락으로 코 밑을 쓸었다. 무언가를 생각할 때 나오는 여자의 습관이었다. 여자는 이내 동작을 멈추고 남자에게 말했다.
“아냐! 물론,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는 것은 정말 낭만적이고 좋을 거야! 피렌체의 두오모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우리가 10년 뒤면, 31살인데, 아마 그때쯤에는 직장을 다니고 있을 거야. 아마도 한국에서 살고 있겠지? 그렇다면, 한국 직장인이 현실적으로 평일일지도 모르는 그 날, 피렌체로 날아가는 것은 말이 안 돼.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현실적으로 장소를 정해야 해.”
남자는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이야기하는 것이 귀여웠다.
“좋아.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니까! 우리만의 장소로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남자가 말한 ‘우리만의 장소’에서 만나자는 제안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러니까, 남산타워가 어때? 우리 사귀기로 하고 처음으로 데이트 한 곳이 남산타워잖아? 그리고 우리가 만난 도시인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아? 서울에 살면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높이 있으니까. 물론,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보이지만.”
남자는 흥분해서 몸을 들썩들썩하는 여자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고 있었다.
“좋아! 그럼 10년 뒤 너의 생일날 만나는 거야?”
여자는 다시 코 밑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아니! 날짜도 우리만의 날짜로 하는 게 좋겠어. 내 생일이면, 서로에게 공평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만난 날로 하자! 우리가 만난 날, 저녁 9시! 야근할 수도 있으니까, 넉넉하게 9시로! 오케이?”
야근까지 생각하는 여자가 우스웠지만, 정말로 신중하게 약속을 정하는 것 같아, 남자는 진지하게 좋다고 답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다시 한 번 신신당부했다.
“10년 뒤, 우리가 만난 날, 저녁 9시. 남산타워에서 보는 거다! 혹시 그때, 너와 내가 헤어지고 난 뒤라도, 옆에 다른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그날만은 꼭 약속 장소에 와야 해! 헤어졌더라도, 그 날 하루 정도는 만나서 밥 한 끼, 혹은 커피 한잔은 할 수 있잖아? 우리가 연인이기도 하지만 동기이기도 하니까!”
남자는 여자가 그때 되면 헤어졌을 거라고 단정하는 것이 싫었다. 소설에 너무 빠져있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과는 그 시간까지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갑자기 헤어짐을 예고하는 말을 꺼낸 여자가 이상하고 어느 날 갑자기 떠나 버리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했다.
“아니! 내 생각에는 그 날 우리가 같이 남산타워에 갈 거 같은데? 각자 퇴근하고 만나서 남산타워에 있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눈부신 야경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을 거야. 그 날은 내가 특별히 좋은 곳을 예약해서 아름다운 꽃다발을 선물할게!”
여자는 갑자기 진지해진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서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소설 속 아오이도 그 날은 둘이 함께일 것이라 생각했다. 둘의 인생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지만, 같은 장소에서 끝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아오이는 쥰세이에게 사랑의 고백으로 10년 뒤의 약속을 했고, 그 말은 그 날 각자 다른 곳에서 출발해서 그곳에서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같이 그곳을 오르자고 한 말이었다.
여자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왜 자신은 10년 뒷면 헤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소설에 너무 빠져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여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중간에 헤어지고 나서 만나게 되었지만, 처음의 그 약속을 하게 된 것은 그때까지 같이 있자고 한 약속이었다는 것을 남자의 말을 통해 일깨워졌다. 소설도 읽어보지 않은 남자는 여자가 먼저 꺼낸 약속에 아오이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아오이처럼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무서웠다. 그가 이런 사랑을 자신에게 준다는 것이. 자신이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인지도 모르겠고, 만약 이 사랑이 흐려지는 날이 온다면, 여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플 것 같았다.
여자는 자신이 훗날 상처받을 것 같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 말했다.
“우리 앞날은 모르는 거야~ 누가 알겠니? 우리가 10년 뒤 어떤 모습일지.”
남자는 여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10년 뒤 그날 여자와 함께 있길 기도했다.
10년 뒤 그 날, 여자와 남자는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사는 게 너무 팍팍해서 그런 약속 따위는 잊고 지낼 수도 있고, 어쩌면 둘이 함께 남산타워에 오르며 지난날의 약속을 떠올릴 수도 있고, 아니면 둘 중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기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 날 약속한 장소에 한 사람만이 서서 추억한다고 해도, 그 어린 날의 아름다웠던 추억은 함께였기에 외롭지 않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