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지막
엄마는 나의 시작을 보았고, 나는 엄마의 마지막을 보았다.
나는 아직도 엄마의 마지막이 눈에 선하다.
중환자실에서 열흘 넘게 맞아 오던 수액 때문에 입술이 퉁퉁 부어 올라 힘없이 툭 하고 열려있었다.
그 입술 사이로 대롱대롱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호흡기를 떼어내고
온갖 방법으로 엄마를 삶의 문턱으로 끌어올리다 완전히 실패한 그 순간.
아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얼굴을 양손에 파묻고 울부짖었다.
나는 울며 무릎 꿇고 앉아 엄마의 오른손을 부여잡았고 오빠는 울음을 겨우 삼켜가며 엄마의 왼쪽 귀에 대고 사랑한다 말했다.
우리 가족에게만 중환자실 면회를 자유롭게 허가해주셨던 담당 의사 선생님은
드디어 올 것이 와버렸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엄마의 사망시간을 선고하셨다.
통통한 연분홍빛 엄마의 입술은 금세 콘크리트처럼 짙은 회색빛으로 딱딱하게 변해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저 세상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줄 없다는 건 정말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어제 뭘 먹었는지 생각하려면 마음먹고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지경이지만,
6년 전. 그날들은 오늘 아침보다 생생하다.
엄마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구급대원의 전화를 받는 시점부터, 수술 후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참담한 얼굴과, 중환자실에서의 13일. 그리고 그날. 아침 7시 첫 면회시간.
우리 가족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엄마가 떠나간 그 순간까지. 나는 모든 것이 선명하다.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을까.
엄마가 갑자기 죽고 나서부터 나는 누군가가 갑자기 죽는 상상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와 대화하고 있는 상대, 또는 내 옆에 있는 지인들, 가족들 심지어 나의 아이까지도 죽는 상상을 하곤 한다.
울부짖으며 실신하는 나를 보고 나서야 상상을 마치는데,
그러고 나면 영 기분이 잡친다. 내 인생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지배당하고 있는 거 같아서.
안 좋은 습관이 생겨버렸다, 엄마가 죽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에 대한 고찰이라고도 포장할 수도 있겠다.
엄마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엄마가 죽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죽음이 그렇게 재채기처럼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하고 나니
일상생활에서 자주 죽음을 떠올린다.
그 습관에 대해 굳이 좋은 점을 억지로 찾자면,
여전한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미래보다는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해졌다는 것.
그 마음이 나를 호주로 이민을 가게 만들었고,
나는 엄마의 부재로부터 도망쳐 그곳에서 치유도 받고 행복을 느끼며 원 없이 살았다.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오늘 하루를 즐기지 못하고
절제하고 절약하는 하루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먼 미래보다 오늘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했다.
오늘만 생각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괜찮은 미래가 있을 거라 믿었다.
헌데, 현재를 더 중요하게 살자는 마음이 오히려 오늘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미래를 생각하고 오늘을 살아야 괜찮은 하루로 쌓이게 되는 거였다.
보장된 미래 없이 오늘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하루보다
보장된 미래가 있어서 얼렁뚱땅 보내는 하루가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인생의 방향을 돌고 돌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니 내 인생 5-6년을 방황하는데 썼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나에게 엄마의 부재를 준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성마저도 흔들어 놓았다.
그 흔들렸던 나의 인생을 다시 붙잡아 준 건,
내 아이의 탄생.
헌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을 가져갔다.
그리고 탄생은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