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al vs. Epidural
사실 무서웠다.
엄마 없이, 엄마가 되는 거.
침대에 누워 촉진제를 투여받는데, 하얀 천정에 보이는 건 엄마 얼굴뿐이었다.
대학생 때였나,
비염 수술을 받기 위해 전신마취를 한 적이 있었다.
간단하지만 또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수술이었던 모양이다.
병원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가는데 내 발끝으로 점점 멀어지는 엄마가 보였다.
벽 코너에 서서 나를 쳐다보는 그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딸이 고작 비염 수술을 하러 들어가는 건데, 얼마나 오만가지 생각과 걱정을 했는지.
몸을 반이나 포개어 기대서 벽에 의지하던 모습에 온갖 초조함이 다 들통났다.
그랬던 엄마가,
애를 낳으러 가는 나를 보면 어땠을까.
그런 엄마를 보는 나는 또 어땠을까.
나는 입덧도 없었고, 임신 당뇨도 없었다. 건강한 산모로 분류되었고, 무탈하게 예정일까지 잘 지냈다.
문제는 예정일 이후였다. 사실문제라고 할 것도 없고, 그저 진통이 늦어진 것.
그렇게 40주도 지나고 41주도 지나 42주를 이틀 앞두고 있는 날. 결국 유도분만을 하러 가게 되었다.
호주는 유도분만을 쉽게 하지 않는다.
원래 예정되었던 유도분만 날짜에 병원에서 내진을 해보더니,
굿뉴스야 너 자궁문이 열려있는데?
집에 가서 편하게 하루만 더 진통을 기다려볼까? 어때?
라며 집으로 돌려보내던 호주 병원 의료진.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출산을 억지스럽게 하려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아이를 낳으러 간다던 우리가 빈 손으로 돌아오자,
몸조리해주시러 호주 우리 집까지 와계셨던 막내고모와 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 지셨다.
그렇지.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하루를 더 기다려도 진통이 오지 않자 병원에서는 저녁에 오라고 전화가 왔다.
2019년 10월 3일 새벽 03시. 42주를 하루 앞두고 유도분만을 시작했다.
촉진제를 맞고 양수를 터트렸다.
다행히 촉진제를 맞기 몇 시간 전부터 조금씩 진통이 오긴 했는데
내진을 해보니 2cm가 열려있었다.
이제 무통주사 차례인가?
사실 나는 이걸 유도 분만하는 날까지도 고민했던 부분이다.
무통주사를 맞을 것인가, 말 것인가.
임신 초기에 주변의 출산 선배들로부터 무조건 무통주사를 맞으라는 강력 권고가 있었기에 나는 당연히 맞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배가 불러오고 출산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유튜브를 찾아보기 시작한 게 이 고민의 발단이었다. 한국에서 자연주의 출산을 하는 조산사들이 만든 유튜브 채널이었는데,
집에서 아기를 낳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 이렇게도 아기를 낳을 수 있구나. 아니, 원래 이렇게 아기를 낳는 거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어떠한 약물 없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한 조산사 분이 한 말이 마음에 꽂혀서 이 고민에 쐐기를 박았다.
진통이 올 때 엄마와 아기가 함께 의기투합해서 힘을 줘야 하는데 무통주사를 맞으면 엄마는 통증이 없으니 아기만 고군분투하면서 나오는 거죠.
어쩌면 진통은 아기가 엄마에게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에요 엄마 저랑 같이 힘줘 주세요.
그 생각이 딱 드는 순간, 무통주사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최후의 수단으로 밀려났다.
일단 좀 참아보고 정말 고통스러워 죽을 거 같으면 맞아야겠다 결심했다.
대신 열심히 연습해둔 라마즈 호흡을 아주 훌륭하게 했다. 오가는 간호사들이 굿잡 굿잡 킵 고잉 이라며
연신 칭찬을 해주었다. 역시 칭찬은 뭐든 기분이 좋다. 그러나 진통이 거세지자 XX 칭찬 따위... 가 되어버렸다.
아, 맞아야겠다. 싶은 순간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진행이 너무 빨리 돼서 나의 자궁문은 이미 8cm가 열려버린 후였고.
무통주사 대신 그들은 해피 가스 호흡기를 나에게 씌워주었다.
해피는 무슨... 호흡에 더 거추장스러웠다. 그냥 해피 가스 호흡기도 다 떼어버리고 생으로 버티기로 했다.
그때부터 눈도 뜰 수 없는 고통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힘주기를 한참 하다가 갑자기 간호사가 의사를 부르더니 알 수 없는 말들로 대화를 했다.
사실 한국말이었어도 알아듣기 힘든 정신이었다.
다만 이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편이 통역을 해준 바로는
아이 얼굴 방향이 내 등 쪽으로 살짝 돌아갔으니,
다시 아이가 원위치에 올 때까지 아이 힘으로 돌게 놔두자.
진통이 올 때는 힘주지 않고 그냥 버티고 있어 보고 1시간 후에 다시 위치를 내진하러 올게.
였다. 그 한 시간이, 아이를 낳고 두 돌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를 통틀어 나에게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진통이 올 때 같이 힘을 주면 차라리 나은데 그 고통을 힘도 못주고 그대로 받고 있자니 온몸이 달달달 떨렸다. 몸을 모로 누운 채 눈도 못 뜨고 침대 옆 손잡이만 양손으로 부서져라 잡고 있었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옆에 있던 남편 덕이었다.
분만하러 병원으로 출발하면서, 아니 만삭으로 뒤뚱거리며 집에서 진통이 올 때만을 기다리면서부터일까.
남편은 예정일 한 달 전부터 일을 줄였다.
그리고 예정일 1주일 전은 거의 집에만 있었다. 그렇게 같이 있다가 같이 병원에 와서
몇 시간에 걸친 태동검사를 하고, 분만실이 나올 때까지 새벽 내내 대기를 하면서도
밥도 먹지 않고 남편이 계속 내 옆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촉진제를 투여하면서 출산이 끝날 때까지도 남편은 간호사보다도 더한 몫을 해주었다.
우리는 사실 한국에서의 출산 스토리만 보고 들어왔던 터라
남편은 분만실 밖에서 대기하다가 탯줄 자르러 들어오는 용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남편은 수술복만 안 입었지 어떤 의료진보다도 더 투철하게 내 출산에 투입되었다.
내 한쪽 다리는 출산 내내 남편의 팔에 기대어 계속 힘을 주었다.
나중에 듣자 하니 남편도 하도 팔에 힘을 주어 나중에는 팔이 덜덜덜 떨렸다고 한다.
그래도 아이를 낳는 엄마만 했겠냐면서...
그렇다.
힘주기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아기가 제대로 된 위치로 찾아 돌아왔고 다시 힘주기를 시작했지만,
내가 이미 힘이 너무 빠져버렸다.
아기 머리가 내려오다가 내가 힘을 더 못주는 바람에, 그 반동으로 산도를 내려왔다 올라갔다를 계속 반복했다. 나도 지치고 남편도 지쳤다.
2시간 동안 힘주기를 해도 안되자 간호사는 나에게 스쾃 자세를 하라고 했다.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여기 PT실 아니고 분만실인데?
뭐? 스쾃? 나 다리 너무 흔들리는데? 안될 거 같은데?
그래? 근데 계속 이대로면 수술하던지 포셉(기계로 아기를 당기는 것) 해야 해.
수술이라니, 포셉이라니,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무슨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일으켜 앉아서 뒤돌아 다리를 굽히고 나는 스쾃 자세로 침대 해드를 붙잡고 또 힘주기를 시작했다. 그래도 안되자 간호사는 결국 의사를 불러왔다.
다리는 계속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흔들리고 있었다.
곧 금발머리의 키가 큰 여자가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이 여자 진짜다.
안녕? 힘들지? 내가 30분 안에 아기 나오게 해 줄게. 같이 해보자.
그리고 가볍고 빠른 발걸음으로 병실 화장실로 가서 기다란 목욕타월을 갖고 나오더니 한쪽은 내 손에 쥐어주고 반대편은 자기 손에 쥐어 자기 손목까지 돌돌 감아매었다. 그리고는 침대로 훌-쩍 올라와 내 다리를 자기 무릎으로 받치며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고서는,
진통이 오면 내가 당길게 너도 힘껏 당기는 거야. 알겠지?
오... 오케이.
그렇게 나는 예전 사극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을 재연하고 있었다.
목욕타월 줄을 잡아당기며 아기를 낳게 될 줄이야.
그렇게 해서 4번 강하게 힘을 주다가 갑자기 금발머리 의사가 타월을 풀고 내 입 앞에 자기 검지 손을 가져다 대며 쉬쉬쉬쉬--- 하는 거였다.
아기 머리가 딱 회음부에 닿았던 거였다. 이제 힘을 다 쫙 빼고 기다리라고 했다. 회음부에 손상을 최소하 하기 위한 절차였다.
호주는 회음부 절개도 해주지 않는다. 힘주기가 시작되고 어느 순간이 되면 계속 간호사가 내 회음부에 따뜻한 물수건으로 수시로 찜질을 해준다. 그게 호주에서는 회음부 절개 대신이었다.
제모도 관장도 없다. 똥 쌀 거 같다는 나의 말에는
괜찮아.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리가 다 알아서 다할 거야. 넌 걱정하지 마.
라는 대답만 해줄 뿐이었다.
안 해주는 거 투성이인데 그게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편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에는 내가 오히려 웃으며,
자. 이제 언제 힘주면 돼? 하고 묻는 여유까지 생겼다.
의사의 신호에 맞추어 마지막 힘주기가 끝나고
나는 드디어 황금이를 만났다.
아기가 내 다리사이에서 나오자마자 간호사들은 신속하게 내 가운을 좀 더 풀어헤쳐
내 가슴에 황금이를 안겨주었다.
내 가슴 위에서 내 피가 묻은 채 울고 있는 아기, 손과 팔에 내 피가 묻은 채 함께 울어주는 남편.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의료진이 내 찢어진 회음부를 꿰매는 동안 나는 계속 아기를 안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의 간호사는 내 가슴 쪽에 서서 아기가 초유를 먹을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먹는 건 차치하고 아직 눈도 못 뜨고 울고만 있는 아기에게,
엄마 젖을 찾을 수 있게 안내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황금이는 제일 처음 나의 냄새를 맡았다.
모든 처치가 끝나고 나는 병실로 이동했다. 물론 내 두발로 직접 걸어서.
그리고 아기도 나와 함께 병실로 왔다. 그때부터는 이제 정말 우리 둘이다.
다행히 고모와 아버지가 몸조리를 해주시러 2주 정도 호주에 와계시던 중이라 나는 따뜻한 미역국은 먹을 수 있었다.
참고로 병원에서 낮에 출산한 나에게 준 저녁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호주의 지극히 평범한 산부인과 식단이다.)
고모는 계시는 동안 부지런히 내 끼니를 챙겨주셨고 나는 부지런히 내 새끼를 챙겼다.
간호사가 4시간마다 나와 아기를 체크하고 돌아갔다. 젖이 잘 나오지 않아서일까 아기가 계속 울자
고모는 배가 고픈 거 같으니 분유를 좀 더 먹여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도 스스럼없이 간호사에게 분유를 좀 달라고 했는데
간호사가 멈칫하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분유 줄 거야? 너 모유수유할 거 아니야?
나는 속으로 응? 왜 그러지? 여긴 분유가 없나? 하고 생각하는 찰나
이거 읽어보고 체크하고 사인해주면 우리가 가져다줄게.
하면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용인 즉 분유가 얼마나 제공되었고 산모가 요구해서 제공했다는 확인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유 대신 분유를 먹으면 모유를 먹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에 분유 수유를 꺼리는 거였다. 그리고 분유를 산모가 원했다는 것에 대해 확실한 서류를 남겨 놓는 것이었다. 그만큼 모유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생각했다.
나를 체크하러 들어오는 4시간마다 모유수유를 매번 강하게 강조를 하였고, 퇴원하고 나가는 날까지도 모유수유가 잘 되고 있는지를 체크했다. 그리고 나가서도 꼭 열심히 하라고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모유수유 관련 센터 브로슈어를 손에 쥐어주었다.
출산하고 3일 입원 후,
나와 아기는 큰 문제가 없어서 퇴원수속을 했다. 보통 한국은 퇴원 후 조리원 천국을 맛본다는데,
나는 이렇게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무통주사를 맞지 않은 건 신의 한 수였다.
주사를 맞았더라면, 스쾃 자세를 해보고 수건을 당기며 힘주기를 할 수 있었을까.
그 고통스러웠던 통증은 없었겠지만,
어쩌면 나는 끝내 (내가 그토록 꺼려했던) 수술이나 포셉을 시도해야 했을 수도 있다.
물론, 출산 방법은 어디까지나 산모 개인적인 선택이다.
그 선택에는 산모의 의지와 상태,
그리고 건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어떠한 강요도 없이 이루어져야 하며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내 선택을 돌아본다면,
이렇게 호주에서 이 자연주의 출산을 그대로 따라본 것.
후회 없는 선택이었고, 어쩌면 나에게 가장 최고의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어쩜 엄마가 되어가는 모습도 엄마를 닮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