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가기 전, 방콕에서의 5일
2017년. 4월
서울에서 멜버른으로 이민 가는 길.
우리는 방콕을 경유해 5일 동안 여행을 하기로 한다.
이번 편은 그 방콕 여행을 추억해보려 한다.
이민 대서사시를 써 내려가기 전 잠시나마 추억여행이랄까.
5년 전이다. 모든 것이 변했을 것이다. 코로나가 훑고 간 방콕은 어떨지 나는 모른다.
다행히도 이 글은 여행정보를 공유하는 목적이 아니다. 여행을 추억해보는 그렇고 그런 글이다. 내 블로그에 우리의 여행을 적어 놓은 것들이 있어서 추억을 불러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진을 다시 보니, 새로운 기억들에 밀려 영구 삭제되었던 기억들이 복구가 되었다.
살갗이 따가울 만큼 뜨거웠던 자외선.
끈적거리는 습도가 온몸에 끼치고 쾌쾌한 매연 냄새는 콧속으로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입안을 가득 채운 망고의 과육.
한 손에 늘 달려 있던 짜릿하게 달았던 연유 커피.
방콕은 끈적거리고 달았다.
첫날 저녁은 노스이스트에서 먹었다. 방콕 맛집을 검색해보면 자주 나오는 곳.
로컬 맛집 스러운 분위기. 실망하지 않았던 메뉴들.
누군가 방콕에 맛있는 식당을 물어본다면 여기부터 말하게 되는 그런 식당이다.
이때 맛있었던 메뉴들보다, 그때 당시 나의 기분을 이야기하고 싶다.
처음 경험해보는 기분이었다. 푸팟퐁커리를 맛있게 잘 먹다가,
갑자기 뒤통수에서부터 그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든 여행 일정을 다 취소하고 이민이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한국으로, 아빠에게 돌아가고 싶다.'
그제야 나는 이민을 실감했다. 아. 이 여행이 끝나면 나는 한국이 아니라 호주로 간다.
갑자기 슬픔이 몰려왔다. 여행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판단이 흐려졌다.
지금이라도 이민을 취소할까?
그러기엔 나는 이미 방콕인데… 신혼집도 정리했고 가전도 다 팔았고
남아있던 살림살이는 모두 호주에 보내 놓았다.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멜버른으로 가는 티켓뿐이었다.
남편에게 여행 첫날부터 이런 잡친 기분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날은 식사를 마치고 일찍 호텔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복잡했던 그 마음이, 자고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 의외로 간단하게 일단락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만약 남편에게 울며불며 집에 가자고 했다면? 내 감정을 고스란히 토로했다면?
나는 괜찮아졌을지 몰라도 이제 그 감정이 남편에게 휘몰아쳤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혼자 조용히 감정을 상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번째 날은 복합 문화공간인 the commons에 갔다.
어디를 갈지 검색을 해보던 중,
콘크리트와 나무들이 같이 어우러진 사진 한 장을 보고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공간을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새로 시도된 공간, 카페, 레스토랑은 꼭 가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이민을 앞두고 한국에서 여기저기 잘 찾아다녔는데, 사실 방콕에서 가본 곳들이 서울에서 가본 곳보다 더 세련되고 개성 있고 독특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트렌드에 앞서지만 유행은 좇지 않는, 어딜 가든 각자의 개성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신선함이 자꾸 방콕을 생각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방콕은 두 번째였고, 처음 방콕을 간 건 2016년이었다.
2016년. 늦은 여름휴가로 10월에 떠났던 첫 방콕.
짧은 기간 안에 방콕과 피피섬까지 가야 하는 일정이어서 날마다 정해진 루트가 있었다.
나의 여행 스타일은 여행 전에 하루하루 계획을 해놓아야 하는 타입.
계획하는 그 시간마저도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지 꽤나 많은 시간을 공들여 검색했다. 나는 그 계획대로 여행이 진행되지 않으면 서서히 기분이 다운되기 시작했던 사람이었다, 내 남편을 만나기 전까진.
남편은 계획적인 사람이다. 호주에서 회계학을 전공했고 한국에서도 기업보험을 다루던 사람인만큼 뭐든 숫자로 정확히 떨어지는 것을 좋아했다. 돈에서도 시간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는걸 극도로 꺼리는 타입. 자기가 생각한 선에서 모든 것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 이런 특성을 간파하는 데는 연애 2년 결혼 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아직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외모는 개성 넘치고 성격도 자유분방하여 이런 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의 위트와 자유분방함에 꽂혔지만, 그가 가진 틀에 또 다른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나도 자유분방하다. 계획은 무계획이 계획이고, 돈은 있을 때 있는 건 다 써야 했고, 시간도 지킨 적보다 못 지킨 적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감사하게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던 덕분에 비난 대신 배려와 이해를 받고 지내왔다. 놀러 다니는 걸 좋아했던 나는 유독 여행에서 만큼은 체계적이었다. 몇 시 비행기, 어디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은 이 정도 가격에 이 퀄리티가 합당한 지를 따져가며 몇 날 며칠을 구글링 하고 여행 지역 지도를 보며 최적의 경로를 탐색했다. 남편은 달랐다. 그래서 우리가 여행을 자주 다닐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내 계획이 그의 계획이다. 어디서 무얼 먹든, 어디 가서 자던 상관 하지 않고 다 맞춰주었다. 갈 곳을 정하지 않고 여행 일정을 시작하기도 하고 식사도 발길 닿는 곳으로 들어가서 해결해도 괜찮아했다. 나는 그의 스타일에 물음표를 가졌고 연애 초반에는 내 계획대로 여행을 움직였지만,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 사이에서 가끔 회자되는 이른바 '쇠소깍'이라고 불리는 에피소드가 있다. 연애 초기 우리는 한껏 부푼 기대를 품에 안고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간다. 쇠소깍을 위한 제주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허나, 쇠소깍을 가기로 정한 날, 날씨가 심상치 않다. 아침부터 불안했는데 이미 풍랑경보에 기상악화로 바다에 배도 안 띄울 만큼 최악의 날씨였다.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뭐에 홀린 사람처럼 10분에 한 번씩 투명카약 업체에 전화를 걸어 '운행하시나요? 오늘 할 수 있는 건가요?' 물어보며 괴롭혔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남편이 '드라이브할 겸 일단 거기로 가자.' 라며 나를 데려갔고.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오늘 어떻게든 빌어먹을 그놈의 투명카약을 꼭 타보겠다 불태우던 내 의지는 절실함이 아닌 반또라이 반항적 고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가 앞을 보기 힘들게 장대비처럼 내렸고 파도는 누구라도 죽일 각오로 해안으로 달려들었다. 눈으로 보고 나니 포기가 쉬웠다. 남편은 이런 상황에 차를 세워 주차를 하고 '일단 내리자.' 라며 우산도 없이 내렸다. 나는 당황하며 말릴 틈 없이 따라 내렸다. 남편은 비를 흠뻑 맞으며 쇠소깍 아래 투명카약이 다니는 물줄기를 옆을 걸으며 구경했다. 나도 그를 따라 비를 맞으며 다녔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할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장대빗속 자유롭게 뛰어다닌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이미 속옷까지 다 젖었다. 개의치 않고 나에게 비가 내리는 만큼 다 맞아주었다. 나는 그때 처음 자유를 느꼈다. 관광지 매점 건물 앞,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처럼 줄지어 서서 비를 피하던 관광객들 눈에는 우리가 구경거리였을 듯하다. 나는 그때를 계기로 어딘가를 나설 때 우산을 잘 챙기지 않는다. 비가 오면 오는 데로 맞고, 그것 역시 훌륭한 추억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를 계기로 그가 이끄는 대로 여행을 해보기 시작했다. 즉흥적인 여행이 오히려 상상하지 못했던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발길 닿는 데로 가다가 우리만의 명소를 만나고 기대 없이 들어간 식당에서 손에 꼽힐 만큼 맛있는 저녁을 가지며, 우연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런 우연을 만났던 시간들이 진정 '여행'이었다.
두 번째 방콕 여행인 데다 4박 5일이라는 긴 일정 덕분에 우리가 시간을 끌고 다니면서 여유롭게 다녔다. 어디갈지는 자기 전에 생각해보고, 결정이 나지 않으면 그날 아침을 먹으며 정하기도 했다. 걷다가 힘들면 예약 없이 눈에 보이는 작은 마사지 샵에 들어가기도 하고, 하루는 타투샵도 가고, 그러다 마침 주말에만 열리는 시장에 가서 목적 없는 구경만 줄기차게 하기도 했다.
이민 전 방콕에서의 마지막 날. 이 하루는 좋은 호텔에서 푹 쉬기로 했다. 그래서 기존에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숙박비보다는 조금 더 투자해보기로 한다. 그렇게 선택하게 된 곳이 바로 카보숑 호텔이었다.
카보숑은 객실이 8개뿐인 부티크 호텔. 하루 숙박 가격은 2인 룸 기준 30만 원대 초반부터다. 방콕 현지 숙박비에 비하면 굉장히 비싼 가격이지만 한 번쯤, 아니 다시 한번 더 가는 것도 좋을 정도로 나는 좋았다. 객실이 많지 않은 만큼 서비스도 집중되었고, 우리만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아늑했다. 매연으로 가득한 도심 속에 정성 들여 마련된 쉼터 같은 곳. 아니, 어쩌면 이곳만은 조심히 비켜두고 도심이 생겨 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게 만든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소품들, 그 소품들이 한 껏 우아해질 수 있게 만드는 인테리어. 지금까지도 이 호텔을 떠올리면 전해지는 잔상이 있다.
평소보다 2배를 더 써서 가본 이곳에서 나는 무얼 얻었을까, 그저 사치였을까. 나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설령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한들 그때 내가 행복했다면 그 값은 충분하지 않았을까. 현실 속에서 우리는 모든 선택을 앞두고 얻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득실을 따지도록 설계되어버렸다. 현실을 떠나온 여행에서 만큼은 선택의 기준이 '지금 행복한가' 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