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겨울. 우리는 이민을 결정했다.
2017년 3월에 호주로 들어가기로 했다.
서둘러야 했다.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출국날짜.
스카이스캐너에서 가장 저렴한 날짜로 3월, 조금 양보해서 4월.
최적의 날짜를 찾았다.
멜번은 태국 방콕을 경유해서 가면 좀 더 저렴하다.
그래서 우리는 호주에 도착하기 전 태국 방콕을 경유해서 일주일 정도 여행을 하기로 한다.
그런 게 잘 맞았다.
아니 이민 가는 길에 어디 다른 나라를 또 들러서 여행을 할 그럴 정신이 어딨어?!
라는 생각을 둘 중에 한 명이라도 할 법 한데,
남편도 나도
그래 여행 좀 하고 들어가자. 라며 손뼉이 잘 맞았다.
이민 앞에 여행이라는 장치를 두고 나니,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는 이민자이기보다는 긴 여행을 앞둔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긴 여행을 앞두고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버리고, 팔면서 내 기분은 점점 홀가분해져 간다.
그 가벼운 기분에 취해 한국에서 남은 기간을 여기저기 잘도 다녔다.
지갑이 어미새를 앞에 둔 제비 새끼 주둥이처럼 쩍쩍 벌려져 돈이 술술술 새어나갔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이제 한국을 떠나니까, 마음이 아주 관대해졌다.
남들이 맛있다는 맛집도 득달같이 가고 저 먼 곳에 새로 생긴 카페도 굳이 굳이 찾아가고...
앞으로 못 보면 보고 싶을 사람들도 만나고
먹고, 놀러 다니고 아주 한량도 그런 한량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철이, 아니 (철은 지금도 없으니.. ) 생각이 없었다고 할까,
그래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이민에 역이민을 치르고 다시 이민을 생각하는 지금은,
마지막이니, 떠나기 전이니, 어쩌니 저쩌니하며
감정에 내몰려 빠져나가던 돈들이 너무 아깝다.
다시 이민을 간다면.
나는 돈부터 악착같이 모을 것이다.
그리고 술술 새어나가는 그 돈구멍들을 모조리 틀어막을 것이다.
이민 준비는 첫째도 돈이고 둘째도 돈이고 셋째도 돈이다.
돈은 타지에서 이민자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전부이다.
돈. 그래 타국에 가서 살아야 하는데 당연히 필요하지.
그렇게 당연한 거 말고 더 없어?라고 묻는다면.
언어(영어)
나는 학창 시절 영어를 곧잘 했다.
다시 말하자면 영어점수를 곧 잘 받았다.
영어는 내 중간 기말고사의 평균 점수를 올려줄 효자 종목이었다.
수능 모의고사에서도 1등급, 많이 떨어져야 2등급이었다.
단어도 뚝딱뚝딱 잘 외웠고, 리딩 리스닝에 있어서 약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단지 문법에 좀 취약했달까.
가서 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근데 정말 그랬다. 가서 하면 된다. 그렇게라도 했어야 했는데 솔직히 게을러 그러지 못했다. 8시간 동안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침대에 눕기 바빴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펼칠 여력도 없고 그럴 마음이 1도 생기지 않았다.
왜냐,
절실하지 않았다.
영어를 못해도 운 좋게 취업은 되었고 그런대로 돈은 벌렸고, 그런대로 또 살아졌다.
그렇게 그런대로 살아지는 그런 삶에 나는 점점 안주했다.
내가 안 되는 건 남편이 다 해주니까.
작게는 핸드폰 유심카드 구매에서부터 크게는 집 구매까지 남편이 다 알아서 했다.
나는 그가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만 가져다 놓으면 되었다.
남편의 혼자의 에너지로 둘이 나누어 살아가다 보니 남편은 당연히 지쳐갔다.
남편이 고생하는 것도 내가 도움이 좀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나와 달리 10년 넘게 살았고, 학위도 있고, 직장생활도 해본 그가
당연히 나 대신 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죽을 각오하고 둘이 함께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하고 왔지만,
나는 자꾸 그 말에 대한 책임 회피를 했다.
사실 아주 잠깐만 하려고 했다. 아주 잠깐만.
엄마의 부재에 대한 황망함과 나를 짓눌렀던 '엄마 대신'이라는 무거운 감투를 내려놓고
호주에서의 내 인생을 잠시나마 즐기고 싶었다. 천천히 하다 보면 어떻게든 다 잘 될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참 무서운 생각이었다. 우리 부부에게 닥칠 갈등을 나는 상상하지 못한 체
나는 나의 이민 놀이를 합리화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호주에서 내가 영어라도 잘했다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아니 확신이 든다.
영어를 잘하면, 기회는 100배 이상 늘어난다.
나는 처음 호주에 갔을 때 운 좋게도 멜버른에 살고 있는 남편 친구의 소개로 직업을 구했다.
영어를 하나도 못하던 내게, 그 회사 매니저로 일했던 남편 친구의 입김으로 운 좋게 면접을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인맥으로 캐주얼 잡(파트타임)은 구했지만 풀타임(정직원)으로 만드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영어는 못해도 어떻게든 풀타임을 따내리라는 각오로 8개월을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한 달 중 하루를 쉰 달도 있었다. 4시간이던 8시간이던 부르는 대로 나가서 일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영어 듣기도 아주 조금 늘었고, 매일 쓰는 일상 영어도 (아주아주) 조금은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안주해버렸다. 그게 가장 큰 실수이자 잘못이자 후회가 되는 일이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영어 공부를 했어야 했다. 문밖을 열면 들리는 게 영어. 보이는 게 영어. 해야 하는 게 영어였다. 폭발적으로 영어실력이 늘 수 있는 환경이다.
게다가 나는 여행객도 아니고 이민자가 아닌가.
영어를 필수로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뭘 믿고 그리 태만했단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다.
호주에서 정착하고 호주 문화 속에 호주 사람들 속에 속해서 살아보리라 다짐했던 그 꿈은
영어만 할 줄 알면 90% 이상 이룰 수 있는 꿈이다.
내 직장을 예로 들어볼까.
나는 이름만 말하면 모두 아는 SPA 브랜드 매장에서 일을 했었다. 처음에는 Floor SA로 들어가서 일했고 Stock room에 풀타임 자리가 났다는 소식에 지원을 해서 보직을 바꿨다. 매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영어를 덜 쓰기도 했고 Stockroom 매니저가 한국사람이라서 어쩌면 일단 당장은 내가 일하기 좀 더 편할 거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직원이 될 수 있는 자리기 때문에 더 잴 것도 없었다. 열심히 일을 배웠고 꾀부리지 않고 했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동대문 원단시장을 검은대봉으로 쓸고 다니면서 주문한 샘플 원단을 걷어 본사로 돌아가는 막내일부터 시작했던 나로서는 어쩌면 의류매장 stock room 업무는 쉬운 일이었다.
실제로도 잘했고 주변에서도 일 잘한다고 알려졌다. 단지 나는 '일은 잘하는데 영어가 좀 안 되는 애'였다.
영어를 못해도 일하는 데는 지장은 없다. 그러나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단언컨대 정직원 이상의 더 높은 자리로 일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호주에서 이건 정말 좋았다고 느낀 건 , 특별히 전문직이 아닌 이상 학벌이나 인종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개인의 역량만으로도 얼마든지 승진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캐주얼로 시작해서 풀타임 그리고 매니저, 스토어 매니저 그리고 인사과로도 지원할 수도 있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인의 근성과 끈기와 성실함은 세계 어딜 가도 탑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나라고 안될 거 같지 않았다. 단지 늘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은 영어였다. 늘 영어 때문에 나는 이 이상은 못할 거라고 나를 자꾸 제자리에 묶어두었다. 그래? 그럼 영어를 미친 듯이 공부했으면 되는데 왜 안 하냐고. 그때의 나를 찾아가 멱살을 잡아서라도 공부시키고 싶다.
영어를 못해도 이민은 가능하다. 하지만 원하는 삶은 살지 못한다.
인종차별보다 언어 차별에 더 시달릴 거라고 확신한다. 못한다면 가서라도 하면 되니까
꼭 영어공부는 해야 한다. 꼭.
그래, 사실 영어는 가서 열심히 하면 되니까 이민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이민에 있어서 절대 필수 조건은 따로 있다.
영주권
이 세 글자에 한 맺힌 사람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남편의 영주권으로 파트너 비자를 받은 내가 감히 입에 올리기 조심스러울 정도로 피눈물 맺힌 사연이 한 둘이 아니다. 나도 남편이 영주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을 택할 수 있었지,
나보고 영주권을 가서 따라고 했다면 나는 절대로 이민은 생각도 안 하고 한국에서 조용히 살았을 것이다.
이민을 가서 바로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나 기회가 있지 않고서는 사실 말리고 싶다.
영주권을 따는 것이 정말 지독히도 힘들다는 것을 나는 이민을 가서 알았다.
주변에서 7-8년이 넘게 살고 아이도 낳았지만 영주권 승인이 나지 않아서 호주에 계속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부부도 있었고, 자꾸 바뀌는 이민법에 지쳐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도 그럴 것이 호주 이민 법이 정말 거지 같았다.
요리사로 영주권을 잘 주다가, 하루아침에 이민법이 바뀌어서 이제 요리로는 영주권을 주지 않는다고 하고.
또 미용사로 영주권을 준다 해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다음 해에 법이 바뀌어서 또 영주권을 못 받는 사람도 허다하다. 영주권 신청을 어렵게 해도 영주권 승인이 나기까지 보통 2년이 넘게 걸린다. 이렇게 영주권을 따기 위해 관련 학과를 전공하고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며 몇 년을 버티던 사람들에게 영주권은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가는 일이었다.
이민은 사실 영주권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몇 년을 살아도 영주권이 없다면 언제고 짐을 싸야하니까말이다.
영주권이 없이는 아직 이민자라 말할 수 없다.
돈이고 영어고 나발이고
사실 영주권이야말로 이민 준비물의 0순위가 아닐까 싶다.
써놓고 보니 부족함 투성이었던 내 지난 이민의 출발을 드러낸듯하여 창피스럽지만, 이 또한 반성하고 싶은 마음에 기록한다. 나는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분명 나보다는 훨씬 깊은 생각과 풍부한 지식으로 이민을 잘 설계해서 성공하실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 한다. ) 그저 허투루 지나가버린 내 이민의 기억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거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