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사실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나는 남편과 함께였다.
사실 이민을 위한 가장 첫 번째 조건이었다.
남편.
나는 혼자서는 결코 이민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다.
4년이라는 짧고 긴 시간들을 내가 감히 호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내 남편이자 내 남편이자 내 남편이었다.
남편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거 같다.
아무래도 남편이 원인제공(?)을 했으니.
남편은 나와 중학교 동창생. 우리는 중학교 1학년 같은 반이었다.
위트 있고 운동을 좋아하고 인기도 좋았던 그는 돌연 중학교 1학년이 끝나자마자
호주로 향했다. 이른바 조기유학이었다.
친구들의 아쉬움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떠났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나름 힘들고 외로운 시간들이었다고.
멜버른에서도 사립으로 유명한 명문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고,
호주에서도 가장 좋은 멜번대를 졸업했다.
취업도 했고 영주권도 받았다. 그런데 다시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원입대.
제대 후 한국에서 취업. 그리고
우리는 네이트온에서 다시 만났다.
‘오랜만이네, 언제 저녁이나 먹자.’라고 했던 게
오늘날까지 매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나는
남편과 연애를 하면서 멜버른이라는 도시를 알게 되었고,
영주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이민을 불씨를 던지게 될 거라고는 알지 못했다.
연애시절엔 호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가서 살아봐도 좋겠다는 얘기는 했었다.
그때는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호주에 가볼까? 가서 살면 어떨까?’
그저 지나가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는 그것이 점점,
아직 풀지 못한 시험문제처럼 어서 답을 선택을 해야만 하는 초조한 무언가가 되어갔다.
남편의 영주권 만료가 곧 머지않았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일단 그의 영주권의 상황이 우리 이민의 불씨였다면,
그 불씨에 기름을 부은 건 엄마의 사망이었다.
상견례를 하고 날을 잡고. 아버지 공장을 새로 지어 이전을 하고.
그리고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원래 예정된 결혼 두 달 전이었다.
하루아침에 엄마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었다.
혼자가 돼버린 아빠를 붙잡기 위해 나는 내 모든 생활을 다 버리고
아빠 곁에 눌러앉았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내 인생을 버리고 아빠 옆에서 엄마 대신이라는 감투를 쓰고 생활을 하다 보니,
나는 울고있는 내 손을 놓아버렸다.
나 역시 엄마를 잃은 슬픔을 가진 사람인데
나를 위로하는 사람은 없고, 아빠 옆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들뿐이었다.
당연하다. 나의 슬픔을 어찌 감히 아빠의 그 처절한 슬픔에 견줄 수 있을까.
이해했다. 내 슬픔은 슬픔도 아니라 애써 밀어내며 아프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게 나를 곪아먹었다. 적당히 짜두었어야 하는데,
나라도 나를 위로해야 했는데.
미련했다.
엄마를 보내고 6개월 뒤, 미루었던 내 결혼식을 올렸다.
예식장에서 최대한 보류해준 기간이었다.
남편의 직장은 서울역. 나의 직장은 충청북도 진천(아버지 공장).
우리의 신혼집을 어디로 해야 할지 결정이 어려웠었다.
긴 고민 끝에 시간의 구애를 조금 덜 받는 내가 남편 쪽으로 치우치기로 했다.
그래서 경기도 광주.
남편에게 좀 더 맞춘 거라 하기에는 남편은 하루 왕복 4시간을 출퇴근에 써야 했다.
나는 하루 왕복 1시간 30분.
160Km를 운전해서 아버지 회사로 출퇴근을 했다.
새 차였던 내 차는 1년도 안돼서 40000km를 넘겼다.
10시 11시 즈음 출근하여 사무 일과 현장일을 보고, 퇴근 후에는 아버지 저녁을 해드 리거나,
빨래 청소도 간단히 하고.
나는 다시 서둘러 신혼집으로 향한다.
공장에 아버지를 홀로 두고 퇴근하는 길은 나에게 만만치 않은 일이다.
혼자 서서 나를 배웅하는 아버지를 백미러로 보는 날이면 그날은 가다가도 차를 세우고 울어야 했다.
매일 같이 울며 신혼집으로 왔던 거 같다. 주차장에서 실컷 울고 진정이 되면 집에 들어갔다.
남편이 이해 못 할 사람은 아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슬픔에 같이 동요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슬픔을 신혼집에 싸들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름 노력했지만 시들어가는 내 모습을 남편이 모를리가 없었다.
내 인생을 놓고 산 지 2년.
'엄마 대신'이라는 감투를 쓰고 사는 게 자식 된 도리이자,
딸이 홀로 된 아버지에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임에도
나는 내 인생을 다시 찾고 싶은 못난 자식새끼였다.
나는
나를 엄마 대신으로 출연시키는 이 모든 연출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미칠 거 같았다.
나는 나대로 살고 당당하게 슬퍼하고 뜨겁게 위로도 받고
때론 행복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호주행은 허울좋은 도피처였다.
남편은 거의 1년을 혼자 집에서 술을 마시며 밤마다 고민했다.
10년을 넘게 살 던 곳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한국이 그리워서. 영주권을 받고 나서도
자원입대까지 해서 한국의 삶을 다시 택했는데.
아니, 무엇보다 다시 그 호주로 돌아가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는데.
지금 한국에서 이렇게 사는 건 맞는 건가.부터 시작해서
영주권을 이대로 포기해야 할까.
아내에게 호주에서의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했다고 한다.
우리의 이민의 이유는
1. 직장
2. 삶의 질
3. 날씨
등등
이렇게 단어로 정의 내려질 수 있는 반듯한 것들이 아니었다.
복잡한 상황과 심경이 풀릴 틈 없이 단단히 얽혀있었다.
나는 내 인생을 찾고 싶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빠는 어떡하지라는 마음에 쉽게 결정짓지 못하고
남편도 나를 위해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은데 그 기회가 이방인이라는 삶이라 쉽진 않은 선택이고.
짙은 회색빛깔의 고민들이 깨소금이 쏟아져도 모자란 신혼집에 1년이 넘도록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렇게 허공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환기시킨건 엄마의 인생이였다.
59년 동안 고생만 하다가 이제 좀 편히 살아보려 하는데
그렇게 한 순간에 가버린 엄마의 인생을 보며,
인생이 참... 짧고 별거 아니고... 하루 아침에도 사라질 수 있는 것. 이라는 걸 알게 되니.
고민하는 이 시간마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볼 수 있을 때 해보고. 가볼 수 있을 때 가보자는 생각으로 우리는 점점 마음을 굳혀갔다.
이 모든 서사를 모르는 혹은 얼추 아는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하나같이 다 뜯어말렸다.
특히 나의 상태를 모르는 사람들은 호주에 대한 환상,
한국인들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도피,
혹은 이민에 대한 좋은 얘기만 듣고 결정지은 철없는 생각이라 했을 거다.
나는 애써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은 나와 내 남편만 알아주면 된다.
우리는 그렇게
응원보다 질타가 많은 이민을 택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의 이민은 괜찮은 선택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