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직장 구하기
7월의 어느 날, 백수이자 주부이자 이민자인 나는,
집에 있는 나를 죄책감이 자꾸 밀어내어 러닝을 하러 나왔다. 반환점을 돌자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호주땅에서 지금 나에게 올 전화는 두 곳. 남편 or 스팸전화. 일단 남편의 번호는 아니었고 낯선 번호였지만, 받아보기로 한다. 영어라도 한 단어 말해보자는 마음이지 뭐.
'여보세요'
'여보세요? 안녕 이본 맞지? 여기 000인데, 우리랑 같이 일했으면 해서 전화했어.'
omg
머리가 띵했다. 지난주에 인터뷰를 봤던 의류 브랜드 합격 전화였다.
내 영어 이름은 이본 yvonne. 한국 이름이 아닌 Yvonne Song으로 전화를 받은 뒤, first name과 last name 도 헷갈리고 내 생년월일까지 영어로 말하려니 연신 머리가 지끈거렸다.(특히 날짜 말할 때 th 번데기 발음하느라 진땀)
같이 일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흥분된 나를 알아차렸는지, 나를 진정시키며 그녀는 얘기를 이어갔다.
'인사담당자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 2주 있다가 일을 시작할 건데 그전에 너의 이메일로 계약서를 보낼게. 사인하고 우리한테 다시 보내주면 돼. all right? '
속사포 랩처럼 펼쳐진 그녀의 영어는 순식간에 끝났고, 모든 질문에 yes yes yes로 대답하며 홀린 듯 호로로록 전화를 끊고 나니 마지막 추임새 all right? 만 귀에 맴돌았다. 묻긴 뭘 물어! 완전 all right이다!!! 호주에 온 지 3개월 만이었다. 나는 드디어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하는 직장을 구했다. 물론 풀타임이 아닌 캐주얼이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나를 귀속시켰다는 게 뛸뜻이 기뻤다. 사실 까놓고 보면 대단한 건 아니다. 그 인터뷰 역시 거기서 매니저로 일하던 언니가(남편지인) 그 회사 인사팀 사람에게 나를 추천해줘서 인터뷰를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정말 이상한 사람만 아니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 기회를 받게 된 나는 운이 좋았다.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어찌나 발이 가벼운지. 남은 2.5km는 음악 없이도 충분했다. 제일 먼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가장 큰 미션이었던 나의 취업. 드디어 해결이 되었다. 분명 남편도 단전부터 명치까지 그동안 꽉 쌓아 올렸던 체증이 조금은 내려갔을 것이다. 인터뷰를 소개해줬던 언니에게도 감사하다고 연락을 했다. 남의 도움을 받는 걸 꺼려하고,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은 지양하며 살았지만, 이제 막 이민 온 내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장황하고 그럴싸하게 빙 둘러 써내려 왔지만 솔직한 말로, 결국 나는 지인 찬스로 일자리를 구했다.
그래도 나를 조금은 덜 못나 보이게 포장을 해보자면,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한인 커뮤니티에 들어가 내가 할만한 일자리를 계속 찾았고, 식당, 미용실, 휴대폰 매장직 등이 추려졌다. 쇼핑센터에 위치한 휴대폰 매장 판매직. 면접을 보러 갔는데 나보다 한참은 어린 나이의 한국 매니저가 내 소개를 영어로 해보라고 했다. 쪽팔리고 떨렸지만 떠듬떠듬 최선을 다했다. 영어로 소개하는 나를 보며 비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내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한인식당은 일단 내 나이가 걸림돌이었고, 풀타임을 줄 수는 없을 거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니. 솔직히 다른 건 다 안돼도 식당일은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손이 느린 편도 아니었고,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니다. 한국에서 대학생활 때 카페 겸 레스토랑인 곳에서 알바도 해봤고. 햄버거 가게와 마트에서도 일해봤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그 궂은일이 나를 마다한다니. 충격적이었다. 미용실 어시스트 면접은 원장이 직접 면접을 봤다. 나의 이력서를 보더니, 정말 헤어디자이너가 하고 싶은 게 맞냐고 나에게 물었다. 내 입은 네... 기술을 배워보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지만, 내 눈은 그러게요 나 정말 하고 싶은 걸까요? 라며 되물었다. 그는 내 눈에서 대답을 얻은 듯했다. 그렇게 몇 번의 면접의 고배를 마시던 중 남편이 같이 청소일을 해보자고 제안을 한다.
남편도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호주 청소 회사를 알게 되었고 나와 팀으로 지원을 해서 청소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한인 청소 회사보다는 규모가 훨씬 컸고 호주 가정집 청소라서 특별히 어려운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우리에게 소비자를 연결해주고 건당 수수료를 떼어가는 시스템이라 우리가 나서서 광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수료를 가져가도 우리에게 떨어지는 돈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 번이라도 더 외국사람들을 만나고 영어도 해 볼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된다는 장점을 남편은 크게 봤다. 큰 회사답게 우리에게 유니폼도 주었고 교육도 며칠에 걸쳐 받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지 않은 건 수. 그래도 잡히는 대로 남편이랑 둘이 열심히 했다. 내 생일에도 남의 집 변기를 닦았다. 멜버른 상류층의 집을 가보는 경험도 해봤다. 모든 경험은 다 남는다는데, 과연 이것도 남는 경험일까 의문이었지만 그때는 당장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경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청소를 한 달 정도 하다가 남편도 이 일을 계속 이어 갈 수는 없다고 느꼈는지 그 사이 풀타임 잡을 구했다. 우리 부부의 청소팀은 해체가 되었다. 대신 나는 집 근처에 있는 한인 초밥집에 일주일에 2번 하루 4시간 정도 일을 하게 된다. 한 시간에 고작 17불. 호주의 일반적인 시급이 20-23불이라고 했을 때 너무 적은 돈이었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는 내가 받는 돈이라고 치면 합당했다. 아무리 긍정적이던 나도 '파란 하늘 맑은 공기'만으로 나를 위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나아져야 할 텐데라는 생각뿐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진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남편이 유학시절 친하게 지냈던 언니가 우리의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하나 소개해준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있는 대형 spa 브랜드 매장 SA 자리였다. 일이 힘들긴 한데 돈을 적게 주는 곳이 아니어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일을 하다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이 학생들, 그리고 유럽에서 온 워홀러들이 많았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 나에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인터뷰가 잡혔고 나는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때 쓰던 포트폴리오도 간단히 프린트했고 내가 운영했던 인터넷 쇼핑몰 자료들도 챙겼다. 사실 가장 문제인 영어는 지금 당장 뭘 한다고 해서 급격히 늘어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포자기였지만 그래도 면접관 눈을 보고 차분히 듣기라도 잘하고 오자는 심산이었다. 인터뷰는 시티에 위치한 꽤나 큰 호텔 로비에서 진행되었다. 이민 와서 그런 건물을 가 볼일이 없었기 때문에 입구에 들어서면서 압도되었다. 호텔의 고급스러운 향기가 코로 들어오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잘하자. 잘하자. 잘하자.'
로비 라운지 소파에 앉아서 면접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는데 나처럼(면접자) 보이는 사람들이 두 명 더 들어왔다. 라이벌인가. 둘 다 외국인이었다. 망했다. 영어는 다 잘하겠네. 잠시 후 인사담당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이름을 묻더니, 다른 방향에 있는 테이블로 가자고 안내한다. 호텔 로비 한편에 있는 상당히 높은 높이의 기다란 테이블, 그리고 그에 맞게 높은 의자. 키가 작은 나는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앉았다.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아서 일까 공중에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 캐주얼한 분위기의 면접. 인사 담당자가 작은 질문에서부터 큰 질문들, 가벼운 질문부터 섬세한 질문들을 잘 섞어서 던졌다. 다행히 맨 끝에 앉았던 나는 3번째로 대답하는 순서였다. 한 명은 영국에서 온 패션 공부하는 라틴계 여학생. 한 명은 20대 초반, 가끔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한다는 호주 여학생이었다. 그들이 차례로 말할 때 입은 웃었지만 머릿속은 세탁기 탈수 때보다도 더 빙빙 돌았다. 안 되는 영어로 문장을 마구 만들었다.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 상관없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전공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어떤 일을 했는지. 일을 하면서 난관에 부딪힌 적이 있었는지. 그때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아주 전형적인 패턴의 질문이었지만 면접자들과 인사담당자는 웃으면서 수다 떨듯 영어로 자유롭게 얘기했다. 나는 그들이 웃을 때 계속 웃어주던 게 다였다. 이윽고 내 차례. 나는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던 시절을 얘기했는데, 인사 담당자가 웃으면서 들어주었다. 점점 영어가 형편없어서 못 알아듣는 구간에서는 애써 표정관리를 해주던 천사 같던 레베카. 인사 담당자 그녀의 이름은 레베카였다. 줄여서 벡(bec)으로 부른다. 내 쓰레기 같은 영어를 고개를 같이 끄덕여가며 끝까지 들어주었다. 이윽고 면접이 다 끝나갈 무렵. 그녀는 우리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나 질문이 없냐고 물었다. 앗. 마지막 찬스를 준다는 신호다. 기회다. 나는 이대로는 끝내고 싶지 않았다. 수줍게 손을 올려 말해도 되는지 물었고. 그녀는 활짝 웃으며 응! 제발 너 말 좀 해줘 플리즈~ 라며 내 움직임을 환영했다. 오늘도 탈락임을 직감한 나는 그냥 솔직한 내 마음을, 진심을 얘기하기로 한다.
'나 사실 여기 이민 온 지 2달 되었어. 여기에 나를 불러줘서 고마워. 오늘 면접 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꼈어. 정말 고마워.'
'oh... yvonne...'
그녀는 내 눈을 보고 자기의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내 말에 감동을 받았다는 제스처를 해주었다. 다행히 내 마음이 전해진 거 같았다. 고맙다는 건 정말이었다. 떨어진다 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 나를 호주 사회에 던져봤다는 시도. 내 심장이 아직 이렇게도 뛸 수 있다는 걸 느꼈었다. 그걸 경험하게 (그것도 이렇게 나이스 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벡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탈락을 했다. 고 생각한 이곳에서 합격이라고 연락이 온 거였다.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나는 캐주얼로 시작했다. 회사에서 필요로 할 때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일종의 계약직이라고 할까. 캐주얼은 정규직은 아니지만 대신 임금이 비싸다. 1시간당 $25. 하루에 4시간만 일해도 $100이다. 그래서 캐주얼로 일하는 사람을 하루 종일 쓰진 않는다. 길어야 4시간-6시간 정도. 많아야 일주일에 3번. 첫 달은 일주일에 한 번 나간 적도 있고, 많으면 두 번 정도였다. 나는 이대로는 안될 거 같아서 매니저에게 풀타임을 하고 싶다고 어필했다. 그럴 때마다 매니저는 자리가 나면, 자리가 나면 이라면서 성의 없이 둘러댔다. 한국인의 근성으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고, 불러 줄 때마다 무조건 나와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일반 직장과는 달리 젊은 학생들이 주로 일을 하다 보니 펑크가 나는 적도 많고 게으르고 꾀만 부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불러주는 대로 나와서 펑크를 다 매워주고 일도 무식하게 열심히 하는 나를 아는 매니저들이라면, 항상 펑크가 나거나 스케줄을 짜야할 때는 우선순위로 나를 찾아 주었다. 그렇게 어떤 달은 30일 중 하루만 쉰 달도 있었다. 그때는 풀타임으로 있는 직원보다 더 월급을 많이 가져갔다. 홀리데이나 일요일에도 일을 했다. 매니저들이 나에게는 8시간 꽉 채워서 스케줄을 주기도 했다. 빨간 날에 8시간을 일하면 나는 2-2.5배를 받는다. 하루에 거의 $500불을 버는 셈이다. 일 년에 몇 안 되는 날이지만 그런 날이 있는 달은 꽤 쏠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풀타임을 계속 원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로는 휴가.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 쌓이는 연차로 유급휴가를 쓸 수가 있다. 나중에 길게 한국에라도 가려면 나에겐 필요했다. 그리고 1년 이상 일하고 임신을 하게 되면 유급으로 출산휴가를 3개월 동안 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풀타임직에 있으면 나중에 (그럴 일이 있을진 모르지만)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할 때도 훨씬 유리하다. 여러 가지 조건들을 보았을 때 들쑥날쑥한 캐주얼보다는 풀타임이 나는 필요했다. 캐주얼은 자리가 많았지만 풀타임 자리는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풀타임 자리가 있는 곳으로 보직을 바꿔서라도 가고 싶다고 어필했고, 마침내 7개월 뒤 풀타임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2년 반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이 회사가 나를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도 잘 안 되는 나를, 써주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여기서 나는 나름 영어도 (처음에 비하면 정말) 많이 늘었고, 친구들도 만나고 호주 젊은이들의 파티 문화도 배웠다. 그리고 만삭이 되어 출산 휴가를 떠나는 날, 인생에서 그렇게 큰 꽃다발을 처음 받아보았다.
이민 기간의 반 이상을 여기서 일했다. 신발이 찢어지게 일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영어를 듣고 쓰며 일했다. 젊은이들의 파티도 즐겨보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른 매장으로 가게 되었을 때는 섭섭하다고 같이 일한 친구들이 이별파티도 해주었다. 이민자로 떠돌던 나를 조금은 호주 사회에 침투시켜 준 값진 시간들이었다.
첫 시작은 '운이 좋게'였지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생각으로 힘들어도 열심히 일했고 또 즐겁게 지냈다.
나를 Yvonne으로 불러주던 호주 멜버른. 그립다.
나는 다시 yvonne 이 되고 싶다. 그때보다 더 멋진 yvonne이 되어 돌아가고 싶다.
나의 호주 안내서
유급 출산 휴가 PPL(Paid parental leave)
호주도 유급 출산 휴가가 있다. 신청자격은 아이를 낳기전 13개월 동안 10개월 이상을 일을 해야 신청할 수 있다. 단, 10개월 중간에 2개월 이상 쉬는 텀이 있어서는 안된다. 즉, 이직을 해도 두달안에 이어서 일을 해야하고 총 330시간을 채워야 출산 휴가를 받을 수 있다. 호주 정부에서 고용주에게 지급한 뒤 고용주가 나에게 지급해주는 시스템이다. 12주동안 받을 수 있으며 주당 $812.45 이다. (2022.10 기준) 육아수당을 받는 당시에는 일을 할 수 없다.
호주 출산 휴가 (maternity leave)
풀타임 직업으로 12개월 이상 일하면 출산 휴가(무급)를 쓸 수 있다. 그리고 원하면 더 연장해서 최대 12개월을 추가로 사용 할 수 있다. 나도 두아를 낳고 유급 출산 휴가시점에 맞추어 육아 휴직 12개월을 사용했고 복직할 시점에 한국을 나오게 되어 12개월을 더 연장했다. 복직은 원하면 언제든 가능하다. 배우자 역시 같은 기준을 충족한다면 당연히 출산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https://www.fairwork.gov.au/leave/maternity-and-parental-leave#what-is-parental-le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