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daugust Aug 07. 2022

#9 다른 박자

이민 부부의 부부싸움

 

2018 09 13 이민 1년 6개월. 우리의 세번째 결혼기념일



 연애 2년 결혼 2년 차, 크게 싸운 적이 없었던 우리. 이민을 와서 드디어(?) 나와 남편의 큰 갈등이 발현이 된다. 남편은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뭐든 닥치는 대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호주에서 10년의 유학생활, 탄탄한 사립 중고등학교, 그리고 호주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교 졸업장. 그러나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 군생활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호주에서의 경력은 없다. 이제 와서 호주에서 일반적인 직장은 구하기 힘들다는 현실은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호주에서는 한국의 직장 경력은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직장을 잡는 건 어려웠다. 그래도 학벌, 경력, 연봉에 대한 미련들을 다 내려놓고 나면. 리테일 샵의 풀타임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그를 당장 받아 주겠다는 휴대폰 가게에서 풀타임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까지 그의 마음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은 호주에 도착해서 가장으로써 가질 수 있는 긴장과 고민이 최대치를 찍었다. 나와 같은 곳에 있어도 그의 공기는 달랐다. 중학교 동창인 우리. 같은 나이이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가장이라는 이유로 갖게 되는 압박과 부담. 책임. 모든 것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물론 그가 호주 멜버른에서 10년 동안 살았기 때문에 이제 막 발을 디딘 나보다 뭐든 나을 것이기에 나 대신 총대를 매야하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럴지언정. 얼마나 캄캄했을까, 우리의 앞날이. 나는 그것도 모른 체 이민자 놀이에 흠뻑 취해 있었다. 날씨에 취해, 바다에 와! 하늘에 캬! 천국에 온 듯한 기분에 취했다.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동네 구경에, 아침마다 조깅도 나가고. 어떤 날은 집에만 틀어박혀 주야장천 미드만 봤다. 어느 날, 그런 나를 참다못한 남편은 회심의 일격을 가한다.


"밖에 나가서 이력서라도 좀 돌려봐"


나는 그 문장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어 아차, 싶었고 그 깨달음의 마지막엔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역이민을 마치고 역역이민을 꿈꾸는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길을, 절벽일까, 막다른 길일까, 한발 한발 걸어 나가야만 알 수 있는 여정에 옆에서 미세한 빛이라도 있다면 큰 의지가 되었을 텐데... 내가 그 역할을 했어야 했다. 우리는 박자가 너무 달랐다. 지금의 그는 그땐 자기가 너무 마음이 급했다고 말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시 호주에 간다면 되려 그때의 그의 박자를 고수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는 이민의 현실을 알았었고, 나는 몰랐다. 다른 박자로 시작된 이민, 만일 그렇게 계속 지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생각보다 정말 많이. 불필요하다 생각하는 잡스러운 마음까지도 꺼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싸우는 게 아닌 각자가 느끼는 감정과 서로에게 바라는 점들을 명확하게 얘기하고 탄탄하게 조율해야 한다. 그리고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건 이민생활이 아닌 일반적인 결혼 생활에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타지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며 생활해야 하는 이민 부부에게는 더 필요하다. 왜냐면 정말 우리 둘 뿐이니까.

언제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한 번은 정말 크게 싸우고 그가 차를 타고 나가 몇 시간은 들어오지 않았다. 호주는 사실 차가 없으면 어디 나갈 수가 없다. 차 선점에서 밀린 나는 영락없이 집에 있어야 했고 그가 돌아오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묵의 화를 뿜어내며 차를 몰고 나왔다. 그런데 집-회사-집-회사뿐이었던 내가 가긴 어딜 갈까.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처음 살았던 바다 근처 아파트로 향했다. 남편과 자주 드라이브 겸 갔던 해수욕장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싸워도, 집을 나와도, 우리가 함께 했던 장소밖에 갈 수가 없고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다. 잠시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30분을 달려 집으로 향했다. 결국 해결방법은 대화뿐이었다. 어떤 싸움이든 그 원인과 이유를 찬찬히 훑어 올라가 그 갈등의 기원을 살펴보면, 나와 그의 다른 박자가 원인이었다. 그는 이민사회의 치열함에 마음이 급했고 나는 너무 느긋했다. 나는 항변했다. 엄마가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2년 동안 아버지 곁에서 엄마 대신의 삶을 살다가 호주에 와서 이제야 나의 인생을 살아보려 시작한 그 시점. 나는 잠시 삶에 여유를 챙기며 즐기고 싶었다. 찢겨 벌어진 마음을 오므릴 시간도 없이 살아야 했던 지난날들을. 지금이라도 좀 보듬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그런 나를 이해해주었다. 나는 이제야 그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너무 몰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호주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악착같이 잡으려 애써야 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에서야 그 모든 기회들이 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갔음을 알았다. 그는 내 손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져 나가는 기회들이 아까웠을 테고 그걸 눈치조차 못 채고 있는 내가 답답하고 안타까웠을 것이다. 역역이민을 생각하며 지금의 마음가짐을 그에게 얘기하면 그는 이제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내가 같은 박자를 타는 거 같다며 내 마음의 변화에 기쁨의 갈채를 보냈다.

 영어가 안되니까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 외면했던 것들. 나는 그런 것들이 한국에 돌아오니 생각났다. 영어가 안되면 치열하게 부딪혀서 되게 만들어 볼걸. 버는 돈이 불만이었다면,   나은 수입을 위해 직종을 바꿔볼걸. 해외에서 받는 교육은 어떤지 경험해볼걸. 하는 후회가 크다.  모든 것들이 남편이 나에게 바랐던 점인데, 그때 나는 남편이 나에게 너무 많은  바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생각했고 그의 생각은 언제나 옳았다.   존중하고 귀담아 들어야 했다. 남편이고  가족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호주를, 멜버른을 나보다  많이 경험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물론 그도 급한 마음에 서두르고 보챘던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서로를 100% 이해한다. 그래서 역역이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있다. 이제 서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박자로 연주해야 하는지 안다. 부부가 이민을 한다면 가장 먼저 어떤 스타일삶의 노래를 연주할지 함께 악보를 구상해야 한다. 그리고 약속된 박자와 음정으로 함께 연주하는 . 그게 전부이지만 협주는 언제나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우여곡절 끝에 1절을 친 지금, 도돌이표로 돌아 어디쯤에선 어떤 박자로 연주를 하게 될까.













이전 08화 #8 내 이름은 YVONN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