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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슈라 Mar 05. 2020

[단편1] 가끔씩, 오래도록

너와 나를 지키며 오순도순



[단편] 시리즈는 모두 픽션입니다 :)




오늘도 수는 작업실에서 자정을 넘겼다.

얼마 남지 않은 전시를 준비 중인데, 공동작업으로 함께하는 작가와 이것저것 회의를 하다가 세 시간을 훌쩍 넘기는 바람에, 오히려 오늘의 할당량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종종 자정을 넘긴다. 회의하는 동안, 늦은 점심으로 쿰쿰한 맛의 와인 한 병과 구운 버섯과 뿌리채소를 함께 먹었다. 기분 좋은 취기와 포만감으로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작업은 꽤 순조로웠고, 마음에 들었다. 그 친구는 와인을 고르는 재주가 참 탁월하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가는 길. 살짝 배가 고파져 무얼 먹고 잠에 들지 잠시 생각한다. 귀찮을 법 하지만 요즘은 간단한 요리에 재미를 느낀다. 게다가 오늘같이 작업이 잘 된 날은 시간에 상관없이 활력이 차오른다.


토마토와 계란을 볶고 따뜻한 매실차를 곁들인다. 적당한 포만감으로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수의 배우자 선과 그들의 아이, 또 반려견 콩이를 만나는 날. 

내일을 앞두고 한 3일 동안은 참 설레었다.


미세먼지 없이 바람이 좋은 토요일. 야외공원에서 보기로 했다. 설렘에 눈이 일찍 떠진 수는 전날에 주문한 식재료들을 챙겨 와 김밥과 샐러드를 만들었다. 페이스타임으로 수의 요리를 지켜보던 선은 배가 고파진다며 빨리 먹고 싶다고 했고, 아이도 콩이도 수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 했고, 자신도 물론 그렇다고 했다.


무려 2주 만에 보는 선!

주말마다 만나기로 했지만, 지난주엔 스케줄이 맞지 않아 한 주 거르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돗자리를 펴고 수가 싸온 김밥과 샐러드를 먹고, 네 식구는 산책을 했다. 그들의 아이는 제법 말수가 많아져 바로바로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투정을 부렸고 끝이 보이지 않는 질문을 이어나갔다. 나이가 제법 든 콩이를 위해 산책 중간중간 쉬어주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요즘 콩이의 건강에 대해 얘기했고, 처음 콩이를 데려왔던 날에 대해 떠올리기도 했다. 해가 저물도록 이야기를 했고, 수는 자연히 선의 집으로 갔다. 저녁을 먹고 아이를 재우고, 수와 선은 어쩌면 연인이었을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2주간 있었던 서로의 부모와 아이에 대한 이야기 또 일에 대한 이야기.


세상은 똑같이 반복되는 듯 하지만, 그 안에는 끝없이 움직여야 하는 일상이 있다.

수많은 일상이 쌓이고 얽혀야만 온전히 유지되는 한 세상. 사람일이 그렇다.  

콩이가 2주 간격으로 4차례를 맞아야 하는 예방접종이 생겼고, 아이의 진로를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이와 수와 선, 모두의 상황에 맞는 홈스쿨링을 하면 어떨까 했지만, 사회성을 생각하자니 서로의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보내는 게 최선의 선택지인가 싶기도 했다. 아이에게 혼란을 주는 건 아닐지 어쩔 수없이 자꾸 주춤하게 된다.


전시 준비는 잘 되어가냐는 선의 주제 전환용 질문에, 수는 눈을 반짝이며 핸드폰에 저장된 스케치와 사진들을 보여주며 재잘댄다. 수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선은 사실 잘 이해가 가진 않지만 어쨌든 행복해 보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가끔 수의 이 많은 상상과 사색들은 어떻게 발현이 되고 표현되어 채워지는지, 참 독특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매력에 여기까지 온 거겠지- 하며 웃어보는 선이다.


이 하룻밤이 지나고 수는 다시 수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헤어지는 이 순간이 너무나 아쉽지만 이것 또한 이들의 일상이 되었다. 자신만의 집과 작업실에 돌아갈 또 다른 설렘이 이 아쉬움을 가라앉혀준다. 선 또한 수를 보내고 다시 온전히 자신의 공간을 정리하는 그 시간을 사랑하고 있다.  


서로의 바쁜 일정을 보내고 가족을 만나는 이 시간이야말로, 무한한 영감을 주고 각자의 삶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한 깊은 안정감을 준다.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드라이를 맞긴 서로의 옷을 찾아오고 그 누군가는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감, 갑작스러운 외부 일정으로 특별한 날 함께하지 못한다는 미안함..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따뜻한 애정, 하지만 그 이면에서 느끼는 불편한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수와 선은 아이를 대할 때도 전보다 여유가 생겼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독립하여, 주말이면 서로가 모여 함께 커피나- 맥주나- 와인을 마시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그 날이, 이들이 바라는 행복의 장면 중 하나이다.


수의 전시가 끝나면 수가 아이와 콩이를 데리고 올 예정이다. 다리가 좋지 않은 콩이를 위해 집에 패드를 깔아놓아야 하고 혹시 바닥에 묻어있을 물감이나 색연필, 가루들을 치우기 위해 한 이틀 동안은 집을 쓸고 닦아야 한다. 아이를 위해 새로운 그림놀이도 구상해본다. 한동안 열지 않았던 작은방 문을 열어 아이의 장난감들과 인형들을 다시 정리한다. 얼마동안 수의 집은 아이와 콩이를 위한 공간이 될 것이다.


선은 그때쯤에 맞추어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오랫동안 계획해온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떠날 생각에 한껏 들떠보였다. 수는 오늘 선의 집에서 보았던, 자기 몸통보다 큰 배낭과 등산화와 갖가지 아웃도어 용품을 떠올려본다. 수에게는 낯선 물건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신이 난 선의 모습에 수도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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