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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슈라 Feb 17. 2020

정리의 시간

내게 요리는 정리의 시간이다.

내게 요리는 생각을 잠재워주는 '정리의 시간'이다.

쌀이 익어가는 밥솥의 규칙적인 소리와 알림은 나의 불안함을 진정시켜주고, 국을 데우고 찌개를 끓였을 때 피어나는 김은 오늘 하루 날 차갑게 했던 냉정함을 데워준다. 채소를 다듬을 땐 나를 괴롭히는 많은 생각들을 조각내 사라지게 한다.  


오늘은 도무지 마음이 한 곳으로 잡히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1월 1일이 되면 새로운 단락의 시작이라고, 그 전날까지의 나태함은 차분히 덮어버리고 싶었는데. 몇 달간 좋은 핑계가 되었던 1월 1일이 지나고 나니 서운한 마음이다.


일찍 일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맞춰둔 알람이 무색하게 늦잠을 잤고, 좀 더 단정한 모습으로 나서자는 다짐은 허둥지둥 챙기느라 결국 어제인지 오늘인지 모를 옷차림이다. 어제와 오늘, 작년과 올해를 달리 할 수 있는 건 저녁 메뉴뿐인듯하니, 오늘은 요리를 해야겠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다행히도 야채들이 단단하게 제 모습을 지키고 있다. 


애호박, 가지, 당근, 버섯, 감자를 꺼내어 흐르는 물에 씻어둔다.

한 통의 단단한 양배추는 조심조심하며 4분의 1조각을 낸 후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얇게 채를 썰어야 하므로 양배추를 잡은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아 힘주어 잡아둔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썰어주면 양배추의 달큼한 향이 슬며시 올라온다. 몇 조각 비죽 썰려 나온 것을 집어먹으면 입 안에 기분 좋은 단내가 찬다. 애호박과 가지, 당근과 감자는 손질하는 재미가 있다. 한입 크기로만 썬다면, 그 모양이 길쭉하든 반듯하든 상관이 없다. 숭덩숭덩숭덩 마음 가는 대로 썰어놓고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두르륵 쏟아내 본다.


초록, 보라, 주황, 아이보리.. 색색의 야채 깍둑이들이 프라이팬을 한 가득 채운다. 얼렁뚱땅해 보여도 알록달록하고 푸짐하니 보기 좋다. 색이 진해지며 노릇하게 익어가는 채소들을 보고 있자니 오늘 나의 부족함과 게으름이 하나 둘 떠오른다. 끝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 올해는 나. 괜찮을까?  생각은 이어지고 불안함이 엄습한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자기반성은 이내 탁해지고 물러져 괴상한 모양으로 내 마음을 휘젓는다. 


후추와 소금을 뿌리고 간장과 굴소스를 넣고 볶아준다. 빼놓을 수 없는 청양고추도 빠르게 가위로 잘라 흩뿌려준다. 달짝지근 매콤한 향이 나고 소스가 재료 위에 흥건하게 스며들었다면 넓적한 볼을 준비한다. 뜨끈한 밥을 푸어 동그란 모양으로 다듬고 그 옆으로 양을 조절해 담아본다. 밥과 함께 먹었을 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을 만큼의 양을 계산해보면서. 마지막에 넣었던 고추 서너 개를 따로 집어 맨 위에 올린다.


싱싱한 재료를 다듬고, 기름에 볶고 뜨거운 김을 쐬며 손을 쓰다 보면 탁한 생각들의 소음은 어느새 조용해진다. 윤기를 내며 돋는 활기찬 색들이, 식욕을 자극하는 향긋한 내음이, 그리고 곧 먹게 될 한 끼에 대한 기대감이 나의 못난 생각들을 덮는다. 


첫 숟가락질에 오늘 하루는 이 정도면 되었다고 위로하고, 다시 두 번 숟가락질에 내 손으로 한 끼를 해 먹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감사하다. 금세 내 세상의 온도가 올라가 있다. 


밀려드는 허기와 함께 심란한 생각들이 떠밀려온다면, 요리를 한다. 주방 가득 재료와 그릇을 꺼내 어질러놓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나. 뱃속이 비면 생각이 차는구나, 언제부턴가 깨닫게 된 나만의 진리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요리라는 행위는 '계속 살아가겠다'라는 나 자신과의 약속일 때가 많다. 바쁘고 지쳤지만 굳이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주방에 설 때, 재료를 손질하고, 냄비와 프라이팬에 쓸어 넣고, 불을 켜고, 중간중간 레시피를 확인하고, 시간을 재가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때.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마음과 시간을 들여 그 일련의 과정을 해내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주저앉아버리지는 않았다고 느낀다. 

<파인다이닝> 기획의 말 중에서 


내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듯한 글귀를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동안 가려웠던 한구석을 대신 긁어주는 듯 속이 시원하다. 게다가 막힘없이 읽히는 반듯한 문장을 만났을 땐 더더욱.. 

최대한 맛있게, 그리고 든든한 내 하루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요리를 하고, 내일도 요리를 하며, '계속 살아가겠다'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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