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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연재 Jul 19. 2020

<책 추천> 중년의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는 책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

"돈 벌면 이혼할 거예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친하게 된 동갑내기 친구가 말했다. 결혼한 후에 전업주부로 살아온 그녀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한 글쓰기 모임에서였다.

어느 날인가 전직 간호사 출신인 그녀가 준공무원급의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원서를 냈다기에 합격을 기원한다고 하자 선뜻 내뱉은 말이다. 예상치 못한 말에 우선 웃으면서 '진심인가, 그냥 하는 말인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내 반응을 생각해 냈다.

난 결혼을 해보지 않았고, 그래서 돈 벌면 이혼하고 싶다는 그 말을 꺼내기까지의 그녀가 겪었을 결혼생활의 지겨움과 벗어나고픈 탈출본능을 감히 헤아릴 수 없기에 난감했다. 이혼을 응원할 순 없어도 그녀의 해방 본능은 지지해 주고 싶었다.

"혼자 살면 어떻게 살고 싶어요?"

뻔한 질문이지만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내가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그런 거 해 보고 싶어요."

예상 가능한 평범한 답이었는데 어쩐지 책 읽기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그녀가 자신만의 독립된 시간을 꿈꾸는 마음이 헤아려졌다. 며칠 뒤, 합격했냐고 물으니 떨어졌단다.

"내 인생에 졸혼은 없나 봐요."

명랑하게 말한 그녀는 더 열심히 글을 쓰겠노라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꾸준하게 글을 썼다. <오마이뉴스>에 3년 동안 무려 3종류의 연재를 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미술과 클래식, 그리고 중년에 관한 글이었다.
                       

           ▲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 겉표지 ⓒ 평단



그녀의 글들은 출판사 편집자들의 눈에 띄었고, 작년에 <다락방 미술관>이라는 책을 출간한 데 이어, 얼마 전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가 출간되었다. 누구보다 '명랑한 중년' 연재의 팬이었는데도, 책으로 읽어보니 또 다르다.


졸혼에 대한 꿈은 여전하지만, 남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복합적이고 동지적이다. 그녀는 '착한 가부장,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상대성이론을 말하는 남편'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도, 이제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 변해가고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를 즐겨보는 중년이 된 남편을 웃으며 바라볼 수 있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녀는 "나는 양보하는 듯 하면서도 자신을 바꾼 적은 없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닮아가는데 그것도 미안하다"고 말한다. 비혼인 나는 겪지 않은 일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사람이 변하는 건 생이 바뀌어야 가능한 법인데 (남편이) 여기까지 온 것만도 참으로 고맙고 다행이다"라는 그녀의 통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리라.


누구와 관계를 맺든 나를 위해 상대가 변해주길 바라고, 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을 버려 주길 바라지만, 그런 기대는 성실하게 깨지고 무너진다. 그래서 서로 뭔가를 일부러 포기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관계로 무르익기까지는 수많은 위기와 아픈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 시간을 통과한 관계는 애틋해지지 않던가.


예전에는 마흔을 넘으면 저절로 점잖아지고 모든 걸 알고 다 해결할 수 있고, 욕망도 다스릴 줄 아는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마흔이 되어 보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마흔과 실제 마흔의 나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서, 당혹감을 그저 '어른인 척' 흉내내는 것으로 덮어버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쓸데없이 엄근진해졌는데, 그럴수록 점점 부자연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나에게 엉뚱한 방법으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해 준 것도 그녀였다. 함께 놀러간 제주도 여행에서 내 옷까지 잔뜩 챙겨온 그녀. 내가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놀라운 색상과 디자인의 옷들이었다. 맨 처음에는 옷을 보고 깜짝 놀랐다가 "이런 걸 어떻게 입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입고 거울을 보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녀가 코디해 준 옷을 입고 2박 3일 동안 남긴 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내 평생 최고로 예쁘고 생기발랄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 주었고, 그 일탈은 새로운 나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그런 일탈을 선물해 주곤 하는데, 그런 이 이야기들을 글로 담아냈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나를 또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는 일이다. '옷 하나로 뭐 그렇게까지' 싶지만 내 속에 잠들어 있던 또 다른 나를 깨우고 만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정말 그랬다. 그래서인지 잘 나이 들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어떤 게 나답게 잘 나이 드는 것인지 모른 채로, 그저 '나이값=점잖음'이라는 공식에 나를 묶어두었다. 그런 나는 다음 문장에 오랫동안 마음이 머물렀다.



"나이듦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주름진 얼굴을 자연스럽게 생각해서 손대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엔 물 흐리지 않도록 가지 않으며, 나이에 맞는 옷을 입고, 오십 넘어 미니 스커트가 롱스커트로 바뀌고, 등산복이 일상복이 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나이듦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마도 무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여든 살이 되어도 여전히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싶고, 하이웨이스트 청바지가 입고 싶을 거라는 그녀. 나는 진짜 그녀가 그럴 것 같다. 오십이 되어서야 적성을 발견하고 인생의 꽃을 피우고 있는 그녀는, 늘 명랑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이 세상에 '맑음' 날씨만 계속되는 인생은 없다. 그녀 역시 아픈 시아버지에 대한 걱정, 사수를 하는 아들, 아픈 친정 엄마, 남편과의 갈등 등 남모를 사정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나면 웃게 된다.


올해 초, 내가 너무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위로해 주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준 그녀는 나보다 먼저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다 이내 우리는 깔깔 거리며 웃어댔고, 그녀와 단짠단짠한 수다를 떨고 난 뒤 거짓말처럼 용기가 났다.


<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는 그런 그녀를 꼭 닮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사정과 아픔은 뒤로하고 달려와 준 것처럼, 중년에 대한 이해와 위로의 문장들은 곳곳에서 튀어나와 와락 안아준다.



"모두가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살고 있다. 드라마는 갈등이다. 그러니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갈등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것만 해결되면 금세라도 울 것 같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이란 애초에 없었다. 그 순간은 비온 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때때로 찰나로 왔다가 사라졌다. 가슴속에 이고 지고 오느라 무거웠을 이야기들이 기어이 입 밖으로 나오고, 돌아가는 길에 흐린 미소가 지어지는 그 순간처럼 짧게. 그리고 다시 드라마 속으로."


그녀를 만나 깔깔 웃고, 찔찔 울고 그러고 헤어지고 나서는 다시 나만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얻었다. 책도 그렇다. 읽다 보면 어쩐지 내 이야기와 닮아 있고, 내 아픔에 닿아 있어서 웃기고 울리는 요물 같다. <명랑한 중년, 웃긴데 왜 찡하지?>를 읽는 당신도 분명 그렇게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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