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일어난 드라마같은 일

50넘어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by 신연재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구나.

살다 보면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지난 7월. 책을 내고 다행히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3쇄까지 찍었다.

책을 낸다고 해서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바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오히려 덤덤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다음에는 어떤 걸 써야 하는 것이었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찾아야만 했다. 글 쓰는 일만으로는 밥 벌어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오십이라는 나이..

올초 방송국에서 일이 끊기고, 어떤 일이든 해야하는 상황에서 프랜차이즈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10개월 정도를 주 4-5일 하루 6-7시간 일했다.

몸은 좀 힘들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문득문득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 아마도 육체적 노동이 주는 유익이었으리라.

그동안 머리 쓰는 일, 아이템을 찾는 일을 하다 보니 1년 365일 일에 대한 스위치가 꺼질 틈이 없었는데 이건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일에 관해서는 스위치가 딱 꺼진다. 그게 이렇게 깔끔할 줄이야. 돈을 좀 적게 번다는 것 빼고는 정말 개운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방송국에서 알고 지내던 후배에게도 연락이 왔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작가를 구하고 있는데 내가 추천되었다면서 곧 연락이 갈 거라고 했다.

‘이건 또 뭐지?’ 싶었다. 난 이미 방송국과의 인연은 끝난 퇴직자라고 생각하고 나름 혼자 은퇴식까지 거쳤는데.. 별일이었다.


옛날 같으면 이게 왠 떡이냐, 이게 왠 기적이냐.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고요했다. 절박한 절실함에서 한걸음 떨어진 긍정적인 고요였다.

후배는 “당연히 해야죠”했지만, 사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도 떠올랐다.

‘이거 내가 해도 되나?’ 할 만큼 메인 프로그램이었고, 내가 해보지 않은 음악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라디오에서의 내 경력이라면, 다큐나 시사교양이었기 때문에 2시간짜리 오후 4-6시 사이의 메인 음악 프로그램을 맡는다는 건, 어쩐지 부담이 되었다.

이제 머리도 팽이처럼 팽팽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머리에 있는 것이 몸으로 옮겨지는 데에도 버퍼링이 심한 내 상태를 알기에 공연히 누를 끼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못해도 부딪혀보는 거지’ 했을 텐데.. 이제 머뭇대는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다.

그런데 나의 망설임과는 상관없이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등을 떠미는 것처럼. 일사천리로 실기 테스트와 면접을 거치고 나는 며칠 사이에 다시 방송작가가 되었다.

나에게 온 프로그램은 CBS 음악 FM 93.9 <박승화의 가요속으로>이다.



누군가를 밀어내고 그 작가의 자리를 꿰차는 건 방송작가 생태계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싫었다.

그런데 다행히 전임자인 최지혜 작가는 다른 방송사로 자리를 옮겨가는 거였고, 인수인계과정을 정말 친절하고 세심하게 해주어서 지금까지도 고맙다.

김정훈 피디는 나를 채용하면서 가장 먼저 양해를 구한 것이 있는데 그 말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때에 따라서는 원고를 수정해야 할 때도 있고, 바꿔야 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감안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원고 수정에 대해 미리 익스큐즈를 구하는 피디는 처음이었다.

작가의 원고를 아무렇지 않게 찍찍 고치는 경우가 다반사인 곳이어서. ㅠㅠ 작가에 대한 존중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디제이인 박승화 씨는.. 내가 버벅대고 실수할 때마다 옆에서 “괜찮다”고 다독이며, 8년차 노련한 디제이답게 잘 커버해준다. 내가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는지, 오직 그만이 안다. ㅋ (감사한 마음에 홍보하나 대놓고 하자면, 유리상자 신곡, 가을하늘.. 진짜 좋아요^^)

느리다고 재촉하지 않고, 못한다고 몰아세우지 않고 기다려주는 사람들 덕분에 난 다행히 적응을 하고 있다.

나중에 피디로부터 나는 정말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있는 자리를 두고 경쟁이 심했을 뿐더러, 딱 한 달만 늦었어도 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드라마 같은 일이었단다. 이곳에 와서 앞뒤 사정을 듣고, 또 실제로 일을 해보니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같이 일하는 피디는 개편으로 다음주면 다른 프로그램으로 이동하지만, 함께한 사람들이 좋았고, 게다가 가요를 좋아했던 터라 내가 젊었을 때 듣던 7080 가요들을 매일 들을 수 있다는 건, 보너스 같은 특혜다. 엄마를 모시고 살면서 보살펴야 하는 내 입장에서 오후 4-6시 프로그램인 것도 딱 적당하다.

내가 가장 익숙했던 자리.. 그러나 늘 불안정했던 자리... 이제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해서 떠났던 자리..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온 지금....

한달 반의 폭풍같은 적응기를 마치고, 다시 출발선에 서 있다.

안물안궁 안부를 전하면서, 다시 쓰겠다고 스스로 각오를 다지면서.

이제 또 부지런히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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