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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영 Jan 26. 2019

<청소년 소설>눈 먼 파수꾼

4

“우성아, 오늘 저녁 뭐 먹을까? 아빠 늦게 오신다는데 그냥 오랜만에 뭐 시켜먹을까? 치킨? 피자?

“오호 좋지. 난 허니콤보!”

엄마가 치킨을 쏘시다니 그것도 아빠가 안 들어오셨는데 나랑 둘이 흔쾌히 시켜 먹자고 하시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방학 전날이고 학원도 없고 오랜만에 편안한 시간이었다. 나는 눈치도 없이 뒹굴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1시간이 다 돼갈 즈음 치킨이 도착했고 엄마랑 마주 앉아 치킨을 영접했다. 노릇노릇 튀겨진 튀김옷에 반지르르 윤이 도는 꿀조합,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바사삭 부서지는 치킨을 먹으며 핸드폰에서 농구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엄마도 좀 보자.”

“이번에 골든 스테이츠하고 덴버하고 경기했는데 1 쿼터에서만 50 득점 이상해서 4 쿼터 끝나고 142대 111로 마무리했대... 와... 덴버 홈경기였는데 홈에서 이렇게 털렸는데 덴버 팬들은 멘탈 나갔겠네... 듀란트, 커리, 탐슨이 다해먹었어! 잠깐 흔들리는 것 같더니 이렇게 다시 입지를 다져버리네! 둘이 1, 2등 팀인데 이렇게 격차가 나버리면 이번에도 우승은 골스인가?

“뭔 소리야. 언제부터 농구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대?”

“나 학교에서 애들하고 점심시간에 매일 농구해. 얘기 안 했나?”

“그래서 매일 그렇게 피곤해하는구나? 적당하게 운동하는 게 좋기는 해도 고등학생이면 체력관리도 해야지 그렇게 재미있다고 지치도록 운동을 하면 피곤해서 공부에 방해되지.”

아차 싶었다. 엄마랑 얘기를 하다 보면 주제가 자연스럽게 기-승-전-공부로 흘러간다. 처음에 시작한 얘기가 뭐였는지 무색하게 결론은 결국 공부로 귀결되는 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다.

“방학 동안 스케줄 관리 제대로 해야지. 요즘 드라마 보니까 서울대 가려고 별짓들 다하더라. 학습 코디니 뭐니 엄마는 그런 거 붙여줄 형편은 안 되니까 네가 열심히 해야 돼. 수학하고 과학 스케줄 빼고 남는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적어보자. 종이 좀 가져와봐.”

바사삭한 치킨 맛이 바사삭 사라져 버렸다.

“아, 치킨 좀 먹고 하면 안 돼요?”

“먹어. 누가 먹지 말래? 먹으면서 얘기하면 되잖아. 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멀티가 안 되니? 옛날이야 밥 먹을 때 입 다물고 먹었지만 요즘은 누가 그러니. 밥 먹으면서 대화하고 그러는 거지. 언제 따로 앉아서 얘기할 시간이 있기나 해? 애가 정이 없어.”

결국 엄마 말빨에 항복하고 종이를 대령했다. 치킨을 다 먹자마자 엄마는 새로 시작한 수학 과외와 수학 학원, 과학 학원 스케줄을 시간별, 요일별로 정리해서 프린트까지 뽑아서 내게 내밀었다. 그럴 줄 알았다.

“노란색이 학원, 과외 스케줄 빼고 남는 시간이야. 그냥 남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보이지? 이거 관리 잘 안 하면 그냥 버려지는 시간 되는 거라고. 자기 주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눈으로 확인해 봐야 시간 관리가 되지.”

 다 옳은 말씀이다. 방학은 놀라고, 쉬라고 있는 게 아니다. 엄마는 나의 1학기 성적을 보고 깊이 충격을 받으셨다. 학업 픽업해주시면서 몇 번 서울대 간 엄마 친구 딸 얘기를 하셔서 ‘곧 뭔 얘기가 있겠구나!’ 짐작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 친구에게 전화를 해 세세하게 코치를 받는 눈치였다. 며칠 후, 무슨 엄청난 선고를 내리듯이 수학 과외를 하나 더 하자고 하시더니 좋다는 과외선생님들을 섭외해 벌써 세 번이나 상담을 받고 왔다. 그리고 아주 듬직하고 우직한 남자 선생님에게 나를 맡기기로 마음 결정을 하셨다. 우리 형편에 과외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온갖 부담을 주시며 돈 아깝지 않게 열심히 하란 말씀과 함께 누누이 이번 여름방학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강조하셨다.

“지금 이 성적이면 서울권 어렵다는 거 알지?  그래도 성적이 상향 곡선을 그으면 승산이 있다니까 포기하지 말고 여름방학 동안 열심히 해. 오히려 드라마틱하게 오르면 자소서 쓸게 많아서 좋을 수도 있어. 재수해서 남들 놀 때 또 공부할 생각하지 말고 남들 할 때 제대로 하자. 대충 아무렇게 해서 아무 대학이나 갈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마. 아무튼 이번 방학 동안 최선을 다해서 해봐. 그리고 힘내. 기죽을 거 없어. 다 먹었지? 쉬었으면 들어가 공부해.”

‘내 기는 항상 엄마가 죽이는데...’ 엄마는 내 기를 살려주시는 게 아니라 본인에게 자기 암시를 하는 것 같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결의는 내가 다져야 하는데 늘 엄마가 먼저 다져서 영 김 빠진 사이다 같이 밍밍하다.

짧고 더운 여름 방학, 벌써 더위를 먹은 것처럼 머리가 빙빙 돈다. 자고 일어나면 1학년 2학기, 아니 자고 일어나면 고 3 겨울, 아니 자고 일어나면 대학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까 먹은 치킨이 완전체가 되어 날갯짓을 하는지 속이 거북하다. 먹을 때 그냥 좀 편하게 먹게 두면 좋으련만...     

오전에 교장선생님 훈화가 끝나고 관악부의 연주를 듣고 짧은 방학식이 끝났다. 교실에 들어와서 담인 선생님의 당부 말씀을 끝으로 나의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드디어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다.

“반장은 애들 각자 맡은 청소 구역 정리 끝나는 거 확인하고, 부반장은 애들 사물함 다 뺐는지 확인해라. 끝나고 보고는 따로 안 해도 되니까 양심껏 들 해라. 방학 때 사고 치지 마라. 끝!”

담임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양심은 내팽개치고 게임하는 아이들에,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빗자루를 들고 쓰는 척하면서 게임하는 아이들에,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가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휩쓸 듯 뿔뿔이 흩어져 가버린다.

“야, 우성! 사물함 확인했냐? 난 애들 다 끝난 거 같으니까 간다. 대충 열어보고 너도 가. 어제 다 빼서 별거 없을 거야.”

“어, 그래. 방학 잘 보내라. 잘 가.”

“방학 잘 보내긴, 넌 방과 후 안 하냐?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방과 후라 또 볼 텐데 뭘.”

애들이 다 빠져나간 교실을 한 번 휘 둘러보고 교실 뒤 사물함을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열었다 닫았다. 반장 말대로 어제 다 짐들을 빼서 사물함은 대부분 텅 비어있었다. 그런데 왼쪽 끝에서 아래쪽 사물함에 아직도 자물쇠가 걸린 채 잠겨 있었다. 누가 참 꼼꼼하게 짐을 빼고 잠가 놓고 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치려다가 사물함 앞에 번호를 보았다.‘9번’ 9번이 누구인지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기억이 났다. ‘9번 박무진’ 무진이의 사물함이었다.

‘아 무진이의 사물함이 아직 그대로 있구나.’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진이 책상 위에 꽃병도 이젠 치워지고 없는데 아직 무진이의 흔적이 여기 남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번호로 된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다가 설마 하며 ‘000’이라는 번호를 맞췄다. ‘툭’하고 맥없이 자물쇠가 열렸다.  

‘아니 말도 안 돼. 이렇게 단순하게 비밀 번호를 설정할 거면 그냥 열어놓지 뭘 잠가.’

어이없게 열린 자물쇠를 멍하니 바라보다 사물함 문을 슬쩍 열었다.

‘왜 이렇게 떨리지.’

나는 꽁꽁 숨겨두었던 봉인을 해제하는 것처럼 긴장되어 입에 침을 바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진이의 사물함은 여느 남자아이들 사물함 같지 않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가지런히 꽂힌 교과서 몇 권, 풀다만 문제집 몇 권, 소설책 한 권, 물티슈 한 개, 노트 몇 권이 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사물함을 비워야 하니 이걸 빼야 하는지 그냥 둬야 하는지...

나는 일단 빼서 쇼핑백에 담아 담인 선생님께 가져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교탁 안에서 낡은 쇼핑백을 찾아내 무진이의 짐을 챙겼다. 책을 몇 권 빼니 뭔가 작은 것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라이터였다. 담배도 피우지 않던 녀석인데 웬 라이터인가 의아했지만 그냥 쇼핑백에 넣었다. 교과서와 문제집에는 무진이의 글쓰기 조곤조곤 몇 군데 적혀 있었다. 글씨체에서 무진이의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책을 챙기고 노트를 챙겨 넣다가 노트를 휘리릭 넘겨보았다.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이 가지런히 놓인 노트.

‘애는 뭘 이렇게 꼼꼼하게 적어놓았대. 공부 잘하는 녀석이라 다르네.’하는 생각을 하며 두 번째 노트를 펼치다 순간 멈칫했다. 노트 속에서 언뜻 나의 이름을 본 것 같았다.      

‘우성이가 사진을 찍자고 다가왔다. 나는 엄마에게 우성이를 소개해드렸다. 아니 우성이에게 엄마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 노트에는 중학교 졸업식날 있었던 일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무진이의 일기장이었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트는 다시 한번 휘리릭 넘기고 덮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쇼핑백을 챙겨 교무실이 아닌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몇 번을 뒤를 돌아보며 쇼핑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현관문을 열고 곧장 내 방으로 가 일기장을 펼쳐보고 싶었지만, 의심 많은 엄마에게 오해 살 짓은 하지 않으려고 천천히 신발을 벗고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왔다.

“방학식 잘했어? 오늘 급식은 안 줬지?”

“오늘은 급식 없지.”

“배 안 고파? 뭐 먹어야지?”

“아직 배 안 고파. 천천히 차려줘도 되는데..”

“아침도 제대로 안 먹고 갔는데 배가 안 고프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밥을 줘? 아님 스파게티 해줄까?”

“스파게티 좋지.”

엄마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내가 배가 안 고프대도 엄마가 고플 거라면 먹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먹을 때까지 몇 번을 물어볼 게 뻔하다. 먹고 들어가서 편하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에 밥 먹을 때까지 거실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엄마랑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밥을 먹는 내내 무진이의 일기장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나질 않아 엄마의 기-승-전-공부 얘기도 건성 듣고 겨우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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