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마셨던 자몽차가 너무 맛있어 자몽청을 한 병 주문해 사 가지고 왔다. 집에 가져온 지 며칠 안돼 순삭! 한 번 담가볼까 하는 생각에 자몽 10개를 샀다. 두꺼운 겉껍질을 벗겨내고 겹겹이 싸여있는 씁쓸한 하얀 속껍질을 제거하고 나면 말알갛고 빨간 속살이 알알이 얼굴을 내민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자몽....겉껍질, 속껍질, 자몽 과육. 이것도 일이라고 반복할수록 솜씨가 나아진다. 수북이 쌓인 자몽 과육을 보며 먹기도 전에 흐뭇함으로 입안이 달달해진다. 병을 깨끗이 소독하고 적당량의 과육과 설탕을 담아 자몽청을 완성했다. 뚜껑을 닫아 창틀에 올려놓으니 만족감에 저절로 두 손이 가슴께로 모아진다. 그렇게 자몽청 담그기에 맛들려 벌써 오늘로 세 번째의 자몽청을 담갔다. 음식 만드는 것에 취미가 없는 나지만 애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이 맛에 만드나 싶은 생각도 든다. 조금 한가하니 이런 것도 할 생각을 하는구나 싶었다. 공식적 나의 비수기 덕분에....
나는 멈추어 있고 사람들은 흐른다.
1월부터 4월까지 나의 비수기.
비수기의 사전적 뜻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수요가 많지 아니한 시기,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해 적극적인 움직임이 적은 시기를 말한다. 하지만 요즘은 성수기니 비수기니 하는 말이 무색하게 개인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여행이나 결혼, 기타 작업들을 계획하기 때문에 특별한 시기를 타지 않는 듯 하다.
하지만 프리랜서인 나의 비수기는 나의 계획, 여건과는 상관없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정해지는 편이다. 학기 중에 기관을 통해 아이들이나 성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다 보니 기관의 스케줄이 나의 성수기와 비수기를 결정한다. 그래서 난 늘 1월부터 4월까지 동면에 들어간다.
연기할 때 어떻게 캐릭터 설정을 하시냐는 질문에 어떤 배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 통장에 입금 확인되면 그 즉시 캐릭터에 맞게 살을 찌우기도 하고 빼기도 해요."
우스개 소리처럼 들렸지만 나도 역시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강의가 없으면 나의 뇌도 정지된 채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어 봄을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월요일 오후, 백화점 갈 일이 생겨 백화점과 붙어 있는 터미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터미널 대기실을 거쳐 백화점으로 들어가려는데 터미널 대기실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이 대기실을 뿌옇게 비추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대기실 tv를 보고있는 사람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들, 저마다의 목적지 버스를 타러 가는 사람들로 무척 분주한 대기실의 모습에 잠시 멈춰 터미널 안을 둘러보았다. 마치 누군가 찾는 사람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누군가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나 내가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차를 가지고 이동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터미널의 분주한 광경에 터미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문득 박수근의 '시장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겹쳐 떠올랐다.
'아, 나는 멈춰 있었고 사람들은 흐르고 있었구나!'
박수근 <시장 사람들>
'바빠, 너무 바빠서...'라는 말로 모든 것이 면죄부가 되었던 생활이 아니었는지 돌아보았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
늘 말로는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 당장 일을 낼거 같지만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를 들어 난 1년 365일을 비수기처럼 보냈던 것은 아닌지.... 한걸음 한걸음 내딛기도 전에 뛰고 싶다고 노래만 부르고 단 한 번의 발걸음 조차 떼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2월의 어느 날, 이 순간은 나에게 비수기도 아니고 휴지기도 아닌 성장의 극성수기 중 하루로 기억되길 바란다.
읽고 싶은 책도 읽고, 보고 싶은 사람도 보고, 쓰고 싶은 글도 쓰고, 생각도 정리하는 그런 시간들로 말이다.
'~하고 싶다'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했다'는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