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다.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은 무의도라고 하는 섬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차를 타고도 갈수 있는 그곳! 그 당시에는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3~40분쯤 가다가 섬 근처에서작은 통통배로 옮겨 타야 했다. 큰 배가 들어갈 수 없는 바닷길이라 중간에 멈춰선 배에서 작은 고깃배로 옮겨타야 섬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작은 선착장에 내려 보따리를 이고 지고 4키로를 걸어들어가야 우리의 목적지인 무의 초등학교가 보였다. 우리 가족은 학교에서 마련해준 자그마한 사택에 짐을 풀었다.학교 뒤에는 제법 울창한 산이 버티고 있었고 , 앞에는 학교와 운동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아담한 보금자리!낯선 섬 생활이 엄마 아빠에겐 꽤나 고되셨을 테지만, 나에겐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던 기억만 남아 있는 곳이다. 지금도 그곳을 떠올리면 그림처럼 그때 모습이 선하다.
물이 귀했던 섬에서 아빠가 제일 먼저 해주신 일은 집 뒷산에 옹달샘을 만들어주신 것이다. 엄마는 거기서 푸성귀를 씻기도 하고 과일이나 김치 등을 담가두기도 했다. 난 그 작은 옹달샘이 참 좋았다. 옹달샘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아지트이자 작은 놀이터였다. 옹달샘 근처 숲에는 계절마다 먹을 수 있는풍성한 것들이 많았다. 머루나무, 산딸기. 앵두나무, 아카시아 나무 등... 먹거리 놀거리가 넘치는 그 곳에서는 하루 종일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 4~5월이 되면 그 숲을 누비던 기억이 더 아련하게 떠오른다.
숲은 한낮에도 습하고 눅눅하고 어스름했다. 살짝 으스스 새벽 같은 기운이 퍼지는 그곳에 뭔가를 두리번두리번 열심히 찾고 있는 어린 나의 모습이 보인다. 허리를 잔뜩 숙인 채 제법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이다.
"엄마, 이거 맞아? 애기손 같이 생긴 거, 여기 엄청 많아! 이거 다 내가 꺾을 래."
축축하고 눅눅하게 덮인 나뭇잎 더미 사이로 빼꼼히 예쁜 손을 내밀고 있는 그것은, 바로 '고사리'였다.
지금은 마트만 가면 중국산이니 제주산이니, 삶은 고사리, 건고사리를 사시사철 흔히 사서 먹을 수 있지만, 그 시절 봄만 되면 어김없이 고 예쁜 손을 수줍게 내어주던 고사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똑~똑~ 딴 고사리를 바구니 가득 담아와 옹달샘에 앉아 꺾이지 않게 살살 씻으면,어린 노동의 댓가를 넉넉히 보상받는 것처럼 흐믓함에 어깨가 으쓱,가슴이 푸듯했다. 잘 씻은 고사리는 그 날 저녁 먹을 만큼만 빼고, 채반에 받쳐 말려두었다.
엄마랑 고사리를 따온 날은 집 안 가득 들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퍼졌다. 엄마의 고사리나물은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들기름 살짝 넣고 살살 볶은 파 마늘 기름에 살짝 데친 고사리를 넣고 후루룩 볶아낸 흔하디 흔한 나물 반찬일 뿐이다.
하지만 가난한 섬마을 선생님네 저녁 밥상은 고기 반찬이 없어도 김치 하나에 고기 맛 나는 갓 딴 고사리나물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충분히 풍성했다.
그때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고사리나물을 보면 어둡고 습기 머금은 옹달샘 옆 숲 내음이 나는 듯하다.
섬에서 살았다고 하면 다들 회나 해산물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지만, 난 반백년을 살도록 아직 해산물과 친해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섬에서 사는 몇 년 동안 망둥어도 잡고, 조개도 캐고, 꽃게도 잡으러 다녔던 기억이 생생한 데도, 음식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저 기억나는 건 푸성귀들 뿐이고 아직도 그런 것이 좋으니 어쩌겠는가. '촌년 중에 상 촌년'이라고 가끔 된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촌스러운 취향도 취향이니 존중해줄 수밖에...
무의도에는 땅콩 농사를 짓는 분들이 많았다. 선착장 가는 길 옆은 온통 땅콩밭이었다. 더위가 물러가고 간간히 '샤라락 쉬~~ 익~'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운동장 가득 파란 하늘이 내려앉는 계절이 오면, 학교 밖 들녘엔 땅콩 수확이 한창이었다. 그 때면 동네 가득 쿰쿰하고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번졌다. 그리고 오늘은 어느 집에서 피우는 냄새인지는 저녁나절이면 알 수 있었다.
"사모님, 계세요. 오늘 캔 땅콩이에요. 올해는 알이 아주 실하게 됐어요. 쭉정이도 별로 없고... 잘 삶아져서 아주 고소해요. 드셔 보세요."
낮에 엄마가 품앗이 갔던 곳에서 삶은 땅콩을 가져온 것이다.
'아, 오늘은 저 집에서 나는 냄새였구나!'
저녁이면 작은 섬마을에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집에서 이 집으로 그렇게 따뜻한 정이 퍼져나간다.
말랑하게 익은 삶은 땅콩 껍질을 벗기면 짙은 황톳빛의 속 껍질이 나온다. 손으로 슬쩍만 비틀어도 속껍질은 힘없이 속살을 내비친다. 뽀얀 속살이 보이면 두 알의 땅콩을 입안에 톡! 하고 털어 넣는다.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과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 볶은 땅콩 하고는 결이 다른 고소함이다.
한 채반 그득하던 것이 삼 형제가 앉아 먹기 시작하니 금방 껍질만 수북해진다.
지금은 햇땅콩이 언제 나오는지도 잊고 산다. 지금은 땅콩을 썩 좋아하지도 않는다. 땅콩 하면 적당히 조미를 가한 짭조름한 술안주 정도! 가끔 음식점에서 밑반찬으로 나오는 땅콩조림! 남편이 좋아하는 땅콩잼! 딱 그 정도이다.
하지만 햇 땅콩이 나오는 9~10월쯤에는 갓 캔 흙 묻은 땅콩을 바락바락 씻어, 소금 간 약간 해서 푹 삶아낸 땅콩의 비릿하고 고소한 냄새가 그 시절 섬 생활의 풋풋함과 아련함을 일깨워 주곤 한다.
음식에 얽힌 추억은 오감에 심상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강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