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함을 파고드는 요즘 시대 도를 아세요
미몽(迷夢)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범죄는 사기라고 알고 있다. 길 위에 휴대폰을 흘려도 훔쳐 가진 않지만 남을 등쳐먹는 건 그다지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날은 첫 출근 날이었다. 오전 내내 업무 내용을 교육받았다. 점심을 코로 먹으며 업무에 대해 생각했다. 이건 돈 준다 해도 8시간 동안 근무하기 싫다는 판단을 내렸다. 복붙하며 기계가 되고 싶은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문을 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은 계약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여유로운 오후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출근에 대한 기대로 어젯밤 잠도 못 잤던 터라 집으로 돌아가며 심신이 너덜거렸다. 어떤 사람이 길을 물었다. 2명의 여성이었다. 이리저리 손짓으로 원하는 길을 가르쳐주고 갈만한 장소도 추천해 줬다. 신호등 불이 바뀌어 이만 가보겠다 인사를 하고 횡단보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등 뒤로 이런 말을 던지는 거다.
"나중에 말하는 쪽으로 가봐요."
홀린 듯 발이 멈췄다.
"뭐라고요?"
횡단보도에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그러자 옆에 키 작은 여자가 말했다.
"아, 언니가 원래 이런 말을 남한테 잘 안 해주는데 그쪽한테 해주네요. 언니가 관상을 좀 공부했거든요."
키 큰 여자가 이어서 말했다.
"기회가 되면 말하거나 가르치는 직업으로 가면 잘 맞을 거예요. 내 과거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냥 말해주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카페 가실래요?”
우리는 근처 카페에서 음료 3잔을 시켰다.
가장자리 쪽 좌석에 앉으며 물었다.
"이거... 이상한 그런 거 아니죠? 무슨 사이비 종교라든지..."
키 큰 여자가 답했다.
"들어보고 아니면 가면 되잖아요?"
태어난 연월일시를 물었다. 여기서도 머뭇거렸다.
"이거 이렇게 말해줘도 되는 거예요?"
그녀 둘이 동시에 웃었다.
"점집이나 사주 보러 안 가봤어요?"
나는 이름까지 말해줬다.
이후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다. 이러쿵저러쿵 노트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해 줬다. 나는 아아 하며 맞장구를 치다 가도 이건 안 맞는 것 같은데 라며 속으로 생각했다. 노트 한 장을 현란한 손놀림으로 채우는 걸 보니 한두 번하는 솜씨가 아니구나 이런 생각도 얼핏 했다. 이제 새로운 종이를 사용해야 할 정도가 되자 지루해졌다. 잠시 충고나 들을 참으로 커피를 산 건데 예상보다 얘기가 길었다. 갑자기 시간이 아까워졌다.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도심 속 간판 없는 절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녀는 내게 거기에 가서 이름을 태우라고 제안했다.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물었다.
웃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아찔했다.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
배신감이 들었다. 아, 당한 거구나. 씁쓸해졌다. 속이지 못하는 눈빛 때문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인 채 쓰게 웃었다.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날 보며 당황하는 두 여자가 감은 눈 위로 느껴졌다.
다행히 이성을 붙잡았다. 인간으로서의 사회성을 떠올렸다. 고개를 들어 새까맣게 굳은 얼굴을 보였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어딘가 내 잘못도 있을 것이다. 그녀들에게 화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시간과 돈이 없다고 대답했다. 의외로 여자는 순순히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얘기를 들었으니, 물건을 사 달라고 했다. 곧바로 알겠다고 말하며 카페를 나가자 이끌었다.
그녀들은 다이소에서 면봉과 다시백, 호일 등 생활 잡화들을 골랐다. 키 큰 그녀가 말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당신은 꼭 이름을 태워야만 할 운명이라고.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웃음 뒤로 안타까움과 분노, 짜증과 슬픔, 역겨움까지 숨겨야 했다.
그녀들은 그렇게 내가 갔을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들을 뒤따랐다. 그러곤 100미터도 지나지 않아 나같이 어둑한 사람을 또 낚은 두 여자가 있었다.
바람잡이였던 키 작은 여자와 우연히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우두커니 지켜보는 내게 그녀는 어색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