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30년을 살았더니 내가 만들어 온 나의 삶에 저절로 책임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지금 내 모습에 누구를 탓하랴?
서른 살 아무개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았다는 가정을 해도 어느 정도는 세상을 살다 간 사람이라 그리 슬프지 않을 만한 나이라는 느낌이다.
과거보다는 마침내 스스로를 잘 알게 되었다는 느낌도 드는데 이건 내가 20대 중후반에 부단한 진통을 겪은 덕분일 것이다.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
비슷한 나이의 유명인들의 삶을 매체를 통해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면 괜히 비교하는 마음도 생긴다. 이제는 그들의 삶은 그들의 삶대로, 내 삶은 내 삶대로 구별해서 보는 게 된다. 삶의 속도는 다른 거니까. 편집된 삶을 부러워할 건 없으니까. 인간이라면 고통은 저마다 있는 법이니까.
얼굴의 낯도 조금씩 두꺼워진다. 10대, 20대 때는 뭐가 그리도 부끄러웠는지. 돌이켜 보면 그 부끄러움은 그만큼 남의 시선과 잣대에 신경을 썼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이게 나야."라는 당당한 마음가짐이랄까. 어찌 보면 한국이 개인의 다양성을 조금 더 존중해 주는 사회가 된 영향도 있겠다.
오만함을 내려놓고 겸손함을 배우게 된다.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혼자 살아갈 수 있지'라고 생각했던 호기로웠던 20대를 지났다. 올해 들어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과 서로 밀고 끌어주며 함께 힘을 모아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어졌다. 장기적인 동반자를 찾고 싶다는 욕구였다. '진정한 삶의 행복은 뭘까?'라는 질문을 하다가 든 생각인데 <<나이가 든 나>>를 그려 보게 되었다. 도파민이 빡! 치솟아 쾌락과도 같은 큰 기쁨과 재미도 좋지만 그 순간은 일시적이다. 이젠 작지만 뭉근한 즐거움을 동반자라고 부를 사람과 즐기고 싶어졌다.
욕심도 많이 내려놓았다. 욕심을 부려봤자 내 바람과 계획대로 모든 게 성취되지 않는다. 성취된다면 그건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나의 능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상하지 못한 타인들의 작용과 운이 상황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많이 웃고, 먼저 웃음 짓고, 억지로라도 웃으려고 노력한다. 예전엔 내가 왜 상대방을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줘야 하나 생각했었다. 지금은 가짜 미소라도 뇌는 웃는 걸로 인식한다는 연구결과를 체득하였다. 나를 위해서 남에게 웃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