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판타지, 우프(WWOOF) 후기
* 옛 노트에서 발췌
* 우프(WWOOF) 란?
간략하게 말하자면 농가에 일손 돕고, 숙식 제공 받음.
기분이 좋지 않다. '탈출'하기 위해 잠을 잘 못 자서 그럴 것이다. 새벽 1시가 넘어서 겨우 잠이 들었다. 갑자기 3시 반에 깼다. 나는 벌써 '탈출'해야 할 시간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혹은 불행히 3시 반이었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 잠이 오긴 왔다. 다시 잠에 들었다. 또 깼다. 4시 반이었다. 그냥 눈을 더 감았다. 깼다. 5시 29분. 1분 뒤 알람이 울릴 것이었다. 얼른 껐다. 알람 소리가 크기 때문에 나를 깨울 뿐 아니라 주인집 어르신들까지 깨울 수도 있다. 침대에 앉아 숨을 고르고 어제 계획을 복기했다. 세수와 양치만 하고 가방을 챙겨 버스 시간에 맞춰 나온다. 나올 때 음성 녹음기를 켜고 나올 것!
어제 버스 시간을 2가지 봐 뒀다. 05시 55분 혹은 06시 15분. 05시 55분 차를 타려 했지만 스킨, 로션을 바르다 놓쳤다. 이미 버스가 내가 탈 정류장에 와 있었다. 새벽 시간이라 버스가 빠르게 정류장들을 지나 온 듯했다.
어쩔 수 없다. 6시 15분 차는 반드시 타야 한다. 가방을 다시 풀었다. 선크림까지는 발라주지 뭐. 선크림을 얼굴에 발랐다. 손이 떨리려 했다. 부부는 이제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그건 매우 조바심 나며 생각보다 공포물스러웠다. 닫힌 내 방문 너머 부부의 움직임을 간파하려 애썼다. 한 분은 화장실에 계시는데 거의 다 씻어가는 듯했다. 한 분은 내 방 앞 부엌에 계신 걸로 추정되었다. 그때 휴대폰에 버스 도착 4분 전이라는 불이 들어왔다. 선크림을 집어넣고 가방 문을 잠갔다. 가방을 들쳐 매고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열었다. 한 분이 예상대로 부엌에 계셨지만 뒤돌아 선채였다. 난 빠른 걸음으로 그 구간을 지나 현관으로 냅다 뛰었다. 미닫이 문 형식인 현관문을 밀어 열 땐 영화 쇼생크 탈출이 생각났다. 절대 구겨 신지 않았던 새 신발을 구겨 신고 계단을 내려왔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뒤를 몇 차례나 훔쳐보며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약 1분 뒤 저 멀리서 버스가 보였다. 제발. 제발. 나를 살려줄 구세주 같았다. 버스가 멈춰 섰다. 행선지를 기사님에게 한 번 확인 후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했다. 끝이다. 끝이구나! 실감이 나기보다 어버버 했다. 버스가 그렇게 몇 정거장을 더 지나서야 '탈출'이 실감 났다.
'나는 거기서 왜 그렇게 있었을까?' 그들 사이에 있던 나는 어느 순간 굉장히 위축되고 왜소해져 있었다. 나는 왜 그녀가 나에게 반말을 쓰며 틱틱거리고 매사 잔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었다. 부부는 내 앞에서도 서로 싸우고 "병신 같은 말 하지 마라"라는 등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언행을 보였다. 굉장히 눈치 보였다. 두 분 사이의 부정적인 기운이 나에게 스며들었고 '이 자리에 내가 있으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부인은 남편에게 뭘 시키거나 부탁해놓고 그걸 수행하는 남편에게 잔소리와 툴툴거림, 탓하기, 비난하는 말투가 심했다. 그 자리에 제삼자인 내가 있음으로 해서 남편께서 부끄럽고 무안스러울 것 같았다. 나는 그때마다 못 들은 척, 못 본 척, 투명 인간이 된 척을 했다. 이런 순간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두 분은 자신의 삶이 좋은 듯 말하지만 같이 있어본 바로는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귀농해서 좋다, 좋은 공기, 넓은 밭, 계절마다 끊임없이 나오는 작물 등에 대해 말로는 자랑하지만 그들의 행동에선, 이 길을 선택했는데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나이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어 이대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부인은 농사일에 식사 준비, 집안일까지 모두 다 해야 해서 매번 지쳐 보였다. 부인은 자신이 한숨을 자주 쉬는지 인식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농사일 후 달콤한 밥을 먹는 그녀의 얼굴에는 인상이 잔뜩 지어져 있었다. 나에겐 이 부분이 실망이 컸다.
농사일은 고단했다. 농사란 인상이 절로 써진다. 일하는 자세는 매우 좋지 않다. 구부리고 구부려지고 굽어져야 한다. 햇빛은 햇빛대로, 비는 비대로, 날이 좋아도 궂어도 힘들었다. 매체에서 보던 농촌생활은 예쁜 모습만 편집된 환영일 뿐이었다. 나는 우프를 통해서 여행자 일꾼이고 싶었는데 그냥 일꾼이었다. 그래서 탈출했고 지금은 여행자다. 어쩌면 둘은 애초부터 성립이 불가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큰 사건은 이거다. 일이 끝나고 휴식시간, 갑자기 부인께서 나를 부르셨다. 내 방문은 열려 있었고 내가 사용한 수건들이 바닥에 있었다. 부인은 내게, 저 수건들이 뭐냐, 수건을 몇 개씩 쓰는 거냐. 저렇게 놔두면 되냐고 하셨다. 그러곤 "너네 집에서도 이렇게 하냐. 너네 엄마는 다 해주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아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원래 내 방문은 닫혀 있었고 나는 수건을 말릴 때 말릴 곳이 마땅치 않으면 방바닥에 일자로 펴둔다. 수건 안 마른 냄새 나도 싫어한다. 하루에 수건 1개 썼다.)
<우프 신청 동기>
- 농촌생활에 대한 동경, 환상 있었음.
-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본다는 경험.
- 가보지 않은 지역이라서 (= 가볼 일 없는 지역이라서)
<좋았던 점>
- 농사일이 어떤 것인지 배움 (= 농촌 환상 부숨)
- 벌의 위력과 위험함을 배움 (= 벌 트라우마 생김)
- 유기농식 밥 먹음
- 좋은 공기
<느낀 점>
- 노인이 되어도 부부(커플) 싸우는 방식은 똑같구나
- 경험주의자이지만, 세상엔 안 해봐도 되는 경험도 분명히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