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안경 삐뚤어졌어. 그거 꼭 써야 돼?”
재수 없게 우리 반에서 제일 덩치 큰 수진의 팔꿈치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반사적으로 터진 눈물에 앞이 흐려졌다. 꼬여버린 팀플레이로 공은 텅 빈 바닥에 낙하했고 조용히 굴러가는 공 옆으로 나 혼자 꼴사납게 넘어진 것이었다. 얼얼한 엉덩이를 붙잡고 있는 나를 보며 서현은 고작 안경에 대해 물었다.
우승후보였던 우리 반은 운 좋게 올라온 3 반한테 졌다. 체육관 조명을 등에 지고 서현이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하필 후보군에 속한 나를 투입시켜 가지고. 서브연습으로 보라색으로 물들었던 손목 멍이 서서히 노란색으로 변할 때쯤, 또다시 반이 시끌 시끌해졌다.
“이번 체육대회 때 나갈 사람?”
“나랑 서현이!!”
“그럼 계주는 누가 할래? 반마다 한 명씩이야.”
“야 당연히 서현이가 해야지!”
“얘 너무 많은 거 같은데?”
반장은 칠판을 쾅쾅 치며 참가자를 모집했다. 단 한 명도 제 자리에 똑바로 앉은 사람이 없었다. 에어컨 틀어 달라 징징대는 애부터 등 돌려 손뼉 치며 노는 애들까지, 교실 안은 중간고사 끝난 이들의 놀이터였다.
“하.. 시끄러워..”
이어폰을 꺼내 오른쪽 귀에 슬며시 꽂았다. 수업도 없는데 하루 종일 엎드려 있어야겠다.
“야. 김애진 엎드리지 마. 이거 다 정하면 자.”
맨 앞줄에 앉은 박서현은 쿨쿨 자다 못해 교과서가 흐물거리는 마당에 나한테만 뭐라 그런다. 죄 없는 입술만 씹어대며 귓구멍에 끼워 넣으려던 이어폰을 다시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반장은 나쁜 애는 아닌데 성질이 더럽다.
“얘들아 그러면 이렇게 적어놓을 테니까 바꾸고 싶은 사람 알아서 바꿔. 참고로 줄다리기는 전원참석이다. ”
여기저기서 작은 탄식이 들려왔다. 살갗을 찌르는 태양 볕 아래보다 서늘한 그늘 아래를 더 좋아하는 애들의 목소리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나도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렇게 단합을 위해 전원 참석인 종목을 하나씩 넣는다. 무리에서 벗어나 조용히 있고 싶은 나 같은 애들한테 얼마나 고역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종례시간이 되었지만 담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안되고 선생님은 지각해도 되는 거냐?’는 반장의 말의 힘 입어 애들은 하나 둘 자기 멋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가방을 정리하는 척하며 5분 정도 시간을 끌던 나도 도무지 담임이 올 것 같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신발주머니를 뒤집어 운동화를 툭툭 떨궜다. 검정, 갈색, 회색 점박이가 박힌 바닥에 먼지도 우수수 떨어졌다. 발을 구겨 넣으며 끽끽 소리가 나는 운동화로 갈아 신는데 지나가는 박서현과 눈이 마주쳤다. 어정쩡한 내 폼이 짜증 났다. 못 본 척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나는 안경 쓰는 애니까. 못 본 것이다.
오늘은 화요일이라서 영어학원에 가는 날이다. 5시 25분까지 아파트 입구에 나와있어야 하는데 벌써 2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만화방에서 미적대다가 늦어버렸다. 달리는 내내 겨드랑이에 땀이 찼다.
“아저씨!! 문 열어주세요!”
“학생~ 운 좋게 탔네. 막 출발하려고 했어.”
“감사합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소미가 손을 흔들었다. 반대쪽 손에 영어 단어장이 들려 있었다. 땀으로 젖은 교복셔츠 안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오늘 시험 안 본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는 목요일이잖아.”
망했다. 하나도 안 외웠는데. 스펀지가 튀어나온 가죽의자에 앉기 무섭게 가방을 앞으로 메었다. 달달 다리를 떨며 가방 문을 열자 꼬린내가 확 풍겼다. 황급히 지퍼문을 닫았다. 간식으로 먹으라고 엄마가 넣어둔 삶은 달걀 세 알이 투명한 비닐봉다리에 대충 담겨 있었다. 따뜻한 날씨에 조금 상했는지 냄새가 역했다.
‘제발. 좀…!’
깜지를 박박 써가며 애꿎은 소미 탓을 해봐도 영어단어는 눈에만 담길 뿐 머리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승리.. 승리…victory 말고? 뭐였지…t.. r.. 트라, 트라..’
결국 쫙쫙 빨간 빗금이 가득한 시험지를 얻었다. 연필자국으로 더러워진 손으로 종이를 구겼다.
‘Triump. 정말 이런 단어를 쓸까? 이게 ‘승리’? 난 패배다. 이 자식아.’
“통과할 때까지 집에 못 가. 조교쌤한테 단어 검사 맡고 갈 수 있어.”
평소 같았다면 얌전히 대답을 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딸기 주근깨>의 마지막 화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단어 50개를 지금부터 외우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아니다. 한 시간 반? 두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쯤이 되어서 집에 도착하면 텔레비전에는 엄마가 잠 안 올 때 보는 골프방송만 나온다. 혼자 남아 강의실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봤다. 지금 집에 가면 딱 여유롭게-.
드르륵, 쿵-
앉은 책상이 덜컹 소리가 날만큼 놀란 나는 황급히 뒤를 쳐다보았다. ‘몰래 집에 갈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선생님께 들켰을까 조마조마했다. 강의실 뒷문을 열고 들어온 주인공은 예상과 달랐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 하이.”
“너 여기 다녀?”
박서현이었다. 맨 뒷자리에서 뒤통수만 보다가 단 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더욱 집에 가고 싶어졌다.
“나 작년부터 다녔어. 원래 월수였는데 화목으로 바꿨어.”
‘왜 오늘 못 봤지?’라는 생각과 ‘반 레벨이 다르구나.’라는 깨달음이 동시에 들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나보다 박서현 반이 더 높은 레벨일까?’라는 쓸데없는 궁금즘까지 피어올랐다.
“너도 오늘 단어 통과 못했어?”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나의 옆으로 서현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마치 학교에서도 친히 나의 옆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라도 한 것처럼 의자를 빼 앉았다. 허리를 숙여 가방에서 단어장을 꺼내려던 서현은 갑자기 킁킁거렸다. 어떤 냄새를 맡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나는 일부러 눈앞의 영어단어를 외우는 일에만 더욱 집중했다. 그렇게 어색하고도 고요한 10분이 흘렀다.
“나 집에 갈래.”
자리에서 일어난 서현은 망설임 없이 가방을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공부에 대한 의지가 크게 없는 걸 보니 나보다 레벨이 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가고 싶어졌다. 지금이라도 가면 아슬아슬하게 애니메이션이 시작하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야, 넌 안 가?”
이미 간 줄 알았던 서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나는 대답 대신 필통을 가방에 넣었다.
“너 집 어디야?”
“햇살 아파트. 버스 타야 돼. 아! “
“왜 그래?”
“나 오늘 교통카드 안 챙겼는데!”
“나 자전거 타고 왔는데 태워줄까?”
별로 안 친한 동급생의 어깨를 붙잡고 집에 가는 길. 가로등이 걷는 것보다는 빨리 버스에 탄 것보다는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을 휘감는 저녁바람이 시원했다. 다만 딱딱한 뒷자리에 앉았더니 작은 턱을 지날 때마다 엉덩이 뼈가 눌려 아팠다.
“야야 천천히 가. “
“빨리 가면 시원하고 좋지 않아?”
“좋긴 한데 자전거 처음 타서 조금 겁나.”
“헐 너 자전거 못 타?”
잡았던 어깨를 세게 꼬집었다.
“아아, 아파!! 너 안 태워준다!”
“이미 도착했거든?”
박서현이 자전거를 타고 낄낄대며 혀를 내둘렀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든다. 저 얄미운 저, 저걸 그냥. 나는 나답지 않게 돌아서려는 박서현을 쫓아 달렸다. 헤실거리며 웃던 서현은 당황했는지 우왕좌왕하다 겨우 페달을 밟고 달렸다. 허둥대는 꼴이 우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의 등을 잡아챘다.
“야야 잡지 마. 다칠뻔했잖아!”
“너, 진, 짜, 사람 열받게 하는 재주 있는 거 알지? 애들이, 너를 왜 좋아하는지 몰라..”
오랜만에 정말 찰나였지만 전속력으로 달렸다. 말하는 호흡이 뚝 뚝 끊겼다.
“와, 너 방금 타조 같았어. 타조 달리는 거 봤어? 저번주에 동물농장에서 선수랑 달리기 시합하는 거 봤는데 딱 지금 너처럼 갑자기 우다다다.. 암튼 달리게 되게 빠르다.”
따라잡았다는 만족감이 스멀스멀 사라지니 괜히 뛰었다는 후회감이 돌았다. 그래도 밤바람이 계속 불어 달리기로 열이 오른 몸을 식혀주었다.
“있잖아, 나 대신 계주 나가주면 안 돼?”
‘체육대회’하면 어렸을 적에 하얀 밀가루에 사탕을 찾아 먹었던 달콤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가벼운 몸뚱이로 이리저리 쏘다니는 즐거움을 누렸지만 지금은 딱히 그러고 싶지 않다. 그 뜨거움과 벅참, 끈적임이 아득했다. 지금처럼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나에게 딱 맞았다.
“나는 하기 싫은데. 벤치에 앉아 있을 거야.”
“그 혹시 내가 너한테 그때 배구 경기하라고 해서 나 피하는 거야? 연습도 열심히 해줘서 나는 고마웠는데.”
“네가 아침에 전원참석 안 하면 안 된다고 협박했잖아!”
“협박 안 했는데..”
미안한 듯 우물쭈물 말하는 얼굴이 조금 억울해 보였다. 사실 박서현은 제안만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박서현 가라사대. 서현이 뱉은 그 말을 소라를 비롯한 애들이 꼭 지켜야 한다고 난리 치는 바람에 아침 7시에 체육관에 모여야 했다. 에휴. 여고 특징이다. 운동 잘하고 조금 잘생겼다 하면 생기는 그 인기가 매섭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서현은 잘 모른다. 무탈하게 살고 싶은 나만 속 터지는 것이다!
“근데 너도 가끔 나 꼬나봤자나? ”
“와 말 거칠다.”
“어쩔.”
“너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니라고 해야 되는 타이밍인데 맞아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서현은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너는 겉으로는 깡말랐는데”
이 말에 진짜 한 대 칠까 고민했다.
“달리기도 잘하고 힘도 은근히 세잖아? 자전거 못 타는 건 의외지만. 어떻게 자전거를 못 타지? 진짜 한 번도 안 타봤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아, 근데 나는 공놀이는 잘해도 달리기 못 한단 말이야. 이제 나이 먹었는지 무릎도 안 좋고 애들한테 못한다고 하기에는 창피해서.. ”
박서현이 되도 않는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눈 크게 뜨고 나 쳐다보면 어쩔 건데. 콱 그냥 또 꼬집어 버릴 까보다.’
“뭐야 서현이 계주 안 해?”
“응 나 대신 애진이가 해주기로 했어.”
“애진이 달리기 잘해?”
“응 엄청 잘 뛰어! 타조 같아. 막 날아다녀!!”
서현이 몸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나는 뒤에서 그런 서현을 째려보았다. 뒤통수가 따가운지 그 정도만 하고 얌전히 자리에 않았다.
“타조는 못 날잖아.”
반장이 말했다.
“그래도 뭐 달리기 잘하면 우리야 좋지. 이름 바꿔서 낸다.”
“조금 아쉽다..”
그렇게 아쉬우면 네가 뛰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안 한다고 하기도 귀찮아졌다. 달리다가 확 넘어져야지. 박서현이 하기 싫어서 나한테 떠넘겼다고 소문내야지. 심통이 난 나는 뒷일은 깊이 생각 안 하고 나쁜 마음만 긁어모았다.
체육대회가 2주 남았다. 4 반인 우리 반은 청팀이 되었다. 하필 3반이 백팀이라 은은한 신경전이 돌았다. 다른 종목은 한 반 씩 청팀 백팀으로 점수내기를 하지만 계주는 홀수반과 짝수반이 뭉쳐 점수를 가져가기로 되었다. 체육선생님이 경기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는 내내 지루하다는 듯 무표정을 띄었지만.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심장이 쿵쿵 거려 잠을 못 잤다.
‘반 대표로 계주를 뛰어야 하다니.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나 달리기 못 하겠어. ”
“그때 엄청 빠르던데?”
많은 애들 앞에서 달릴 생각 하니 긴장이 되어서 못하겠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한다.
“어떡하지. 이제는 이름 제출해서 못 바꿀 텐데?”
“…”
“아니면 그냥 그날 아프다 하고 내가 대신 뛸 게.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박서현은 미안함과 난처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표정을 했다. 얼굴에 감정이 참 잘 보이는 친구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그렇게 하자.”
나는 미안한 마음만 받기로 했다.
오지 말라고 되뇌던 그날이 왔다. 내가 계주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체육대회 당일이 되어도 전과 달리 심드렁했다. 학교 운동장 위로 종이조각과 흙먼지가 날아다녔다. 전교생이 떠드는 소리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오늘 아픈 학생이다. 아침에 화장실에서 본 내 얼굴은 늘 그렇듯 창백했다. 평소와 같으면 오히려 이상할까 싶어 엄마 화장대에 있던 파우더를 입술에 바르고 나왔다. 혹시나 지워질까 반장이 쏜 포카리 음료수는 소라에게 넘겼다.
“애진이 괜찮아? 오늘 계주인데 어떡해..?”
소라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옆에서 서현이 꼴딱 꼴딱 마시는 음료수가 정말 시원해 보였다.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몸에 힘껏 쭈그렸다. 안 그래도 이미 더위에 지쳐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내가 준 포카리를 다시 빼앗아 마시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원래대로 내가 계주 뛰기로 했어.”
“오 진짜? 다행이다!!”
“근데 줄다리기는 나갈 수 있겠어?”
“반 단체전이라서 웬만하면 하는 게 좋을 듯?”
반장이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역시 칼 같은 애다. 얼굴이 찡그려지는 걸 억지로 참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이 정도면 원수지간 아닐까. 하필 그 많은 백팀 중에 3반과 줄다리기를 하게 되었다. 서현은 반애들의 호응에 못 이겨 가장 앞줄에 서야 했다. 그 뒤를 수진을 비롯한 애들이 섰고 나는 가장 맨 끝에 섰다.
“자, 쌤이 3초 세고 호루라기 불 테니까 그때 시작하는 거야.”
심판 역할을 하는 체육 선생님이 우리 반과 3반 가운데 서서 룰을 설명했다. 설명을 마치고 호루라기를 잡는 손을 모두가 쳐다보았다. 시끄럽던 운동장에 집중 어린 적막이 맴돌았다.
“3, 2, 1,,”
“악!!”
체육선생님의 휘파람 소리 대신 서현의 비명이 들렸다. 그전에 내 몸도 앞으로 쓰러졌다. 반 애들이 연속으로 고꾸라지며 비명과 함께 소란이 한동안 일었다. 가장 앞에 선 서현은 보이지 않았다.
“호루라기 불면 시작하라고 했지!”
“죄송해요 착각했어요..”
“선생님, 얘 피나요!!”
서현의 무릎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시뻘건 피가 다리를 타고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근처에 있던 담임이 서현을 데리고 사라졌다. 반 애들은 걱정과 분노를 바탕으로 3반을 깔끔하게 밟아버렸다.
경기를 마치고 환호하는 우리 앞에 서현이 붕대를 감고 등장했다. 축하한다며 웃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달리기 어떡하지?”
“.. 괜찮아 내가 뛸게.”
“진짜? 괜찮겠어?”
“… 아니. 넘어지면 쪽팔리겠지?”
“넘어지면 아파. 져도 되니까 천천히 뛰어.”
“알겠어.”
문제없다는 듯 패기 있게 대답했지만 머리 안은 복잡했다. 나에게 다가오는 2반 친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2반 친구가 다가올수록 ‘저 봉을 못 잡으면 어떡하지?’ ‘중간에 떨어뜨리면 어떡하지?’ 온갖 상상이 발목을 잡았다.
“파이팅!! 김애진 파이팅!!!”
“조심히 달려!!”
시끄러운 반 아이들의 함성이 굳었던 몸을 일깨워주었다. 괜찮다. 나는 원래 달리기를 잘한다. 못해서 넘어져도 괜찮다. 달리는 폼이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괜찮다. 움직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일순간에 2반 친구 손에 있던 봉이 내 손안에 들어왔고 나는 지체 없이 발을 굴렸다. 숨이 찼다. 심장이 펌프질 하는 소리가 귀에 윙윙거릴 만큼 크게 울렸다. 달리는 순간에는 내 숨소리, 벅찬 심장소리로 함성마저 잘 안 들렸다. 땀이 머리카락을 적셔도 시원한 바람이 쓰다듬어주었다. 잠깐 자전거 뒷자리에 탔던 그때가 떠올랐다.
영원 같았던 몇 초 남짓의 달리기가 끝이 났다. 승패의 무게를 다음 타자에게 넘기고 힘 풀린 다리를 이끌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않았다.
“와 애진아 너 진짜 잘 달린다!!”
소리가 양손에 엄지를 빼어 들고 말했다.
“그렇지! 얘 대박이라니까!!”
입술이 빠싹 말라 혀로 감추었다. 입안에 짭짤한 맛이 감돌았다. 두 개의 폐가 하나로 합쳐지는 듯했다. 심장이 목구멍을 타고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희열감이 돋아났다. 계속해서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