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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Sep 02. 2019

포도 한 알도 인생이 있잖아요.

그렇게 취미를 가진다.

포도 한 송이를 먹기엔 너무 많아서, 좀 잘라서 가져가려다가 멀쩡한 알 하나를 짓이기고 말았다.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먼저 든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망친 기분이었다. 달콤한 과육을 가득 품고 탱탱한 기세를 뽐내는 앞날이 창창한 포도였을텐데.. 나에겐 one of them이지만 그 자신만은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였을텐데. 내 무심한 손길 하나로 짓이겨져 맛보지도 못하고 버려졌다. 요즘 내 상태가 이렇다. 너무 기대했던 면접에서 떨어지고, 포도 한 알에도 마음이 아프다.


살면서 암벽등반, 헬스, 요가, 필라테스, 달리기, 줄넘기, 농구, 크로스핏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운동에 도전했고, SF 책 읽기, 락 음악 듣기, 디지털 드로잉, 색연필/수채화/유화 드로잉, 글쓰기, 영화감상, 영화 제작, 기타, 요리, 식물 키우기까지 수많은 취미를 거쳤다.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도 전부 조금씩 배웠다. 그 가운데 내 취미는 이거야! 할 만큼 오랜 시간을 쏟아부은 활동은 딱히 없었다. 흥미로워 보여서 시작했으나 지속할 만큼의 동력을 얻지 못했다. '당장 생계가 급한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늘 발목을 잡았다. 한마디로 긴 몰입의 시간이 없었다. 장인이 되고 싶었으나 1만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그래도 그런대로 살 만했다. 공부든 일이든 늘 뭔가 할 일이 있었다. 할 일을 끝내면 뿌듯했고, 잠시 나에게 보상의 휴식을 준 후 다시 다른 일을 바쁘게 해치웠다. 그런데 공백이 생겨버렸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도, 누군가 나에게 할 일을 던져주지도 않는다. 벌써 그 공백이 세 달 째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부쩍 왜 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유치원생은 대학이 서울대밖에 없는 줄 알듯이, 20대 초반엔 대형 회사 말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한 회사의 면접에서 기어코 떨어지고, 오늘 취업지원 게시판을 보다가 미래를 상상했다. 제 힘으로는 결국 한계를 넘지 못한 낭비된 사람.


나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잠재력도 깡다구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 마음은 저만치 앞서 있는데 현실은 제자리걸음이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마음이 착잡했다. 죽고 싶진 않지만 진지하게 왜 사는걸까 묻고 싶었다.


그래서 또 취미를 만들었다. 잠이 취미라는 글 뒤에 쓰기는 민망하지만 취미는 자아실현의 다른 말이기 때문에 조금은 삶의 이유를 찾아 주는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건 디지털 드로잉과 글쓰기. 여전히 금전적으로나 명예적으로나 별 다른 보상이 없기 때문에 아주 미미할 뿐이지만 최소한 씨앗은 찾은 거 아닐까. 꾸준히 하다 보면 꽃이 될 날도 오지 않을까. 무책임한 낙관 같다는 생각이 머리 뒤 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 이 두 선택지밖에 없기 때문에 하기를 택한다. 정말 그런 날도 오지 않을까?


포도 한 알도 인생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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