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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미 Jun 02. 2019

잠이 취미인데요?

책: 우리는 왜 잠을 자야할까

사당오락 (四當五落)

학창 시절 내가 가장 치를 떨었던 말이다.

잠을 충분히 자면서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날도 많았다. 그런 살인적인 교육법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강압적인 것에 절대 순종하지 않으려는 고집이 있는 편이다. 오기. 결국 선망하던 대학에는 입학하지 못했으니 쌩고집의 최후라고 할 수 있겠다. 허나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고집을 꺾었을지는 모르겠다.


출처: 구글


책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왜 계속 잠을 필요로 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사람들 말대로 적게 자는 게 이기는 거라면 진화 과정 속에서 그냥 없애버리지. 도대체 왜 거추장스러운 잠을 그냥 뒀을까? 혹시, 수면에 우리가 모르는 어마어마한 혜택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다분히 합리적인 의심이다. 우리는 진화 과정에서 뇌를 형성함으로써 최고의 성취를 이뤘는데, 그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잠의 수요가 계속 늘어만 갔다.


여기에 전부 적기도 뭣할 만큼 많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를 근거로 책은 잠이 자연의 선물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토록 갈망하는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면 오히려 잠을 자야 한다는 것. 그중 내게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 사실을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잠을 자는 동안 뇌에서는 렘수면과 비렘수면이 계속 반복된다. 두 단계는 각각의 역할이 다르다. 우선 렘수면을 통해 정서 지능 능력이 강화된다. 남을 이해하고, 감정을 풍부히 하고, 감정을 조절 능력 말이다. 이 렘수면을 충분히 취해야만 궁극적으로 소통의 기반이 마련된다. 또 한 가지 기여는 창의성이다. 새로운 정보를 기존 삶의 목록과 대조하여 연결고리를 형성해내는 일을 렘수면이 담당한다. 단순히 정보를 뇌에 처박아두지 않고 전체적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생각해내고, 독창적 착상을 품고 기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놀라운 기능을 해내는 것이다. 비렘수면은 기억의 응고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깨어있는 동안 해마에 저장된 단기 기억을 뇌피질로 옮겨 장기기억으로 저장되도록 돕는다. 그러면 해마도 말끔히 포맷되어 다음 날 또 다른 단기 기억을 받아들일 수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운동 기억도 수면을 통해 강화된다. 아무리 연습해도 잘 쳐지지 않던 피아노가 잠을 자고 나서 마법처럼 자연스럽게 쳐졌던 경험이 있는가? 비슷한 경험이라도 있다면 공감할 것이다. 운동 기억 강화는 사실 기억을 저장할 때와는 달랐다. 자는 동안 기억이 저장소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뇌 회로 전체로 옮겨졌다. 비렘수면, 특히 8시간 수면 중 마지막 2시간 (12시에 잠들었다면 오전 6-8시)과 관련이 있었다. 수면 방추가 가장 많이 치솟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특히 수면 방추가 운동 피질(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칠 때 자극되는 뇌 위치) 위에서 국지적으로 증가할수록 깨어났을 때 기술이 더 향상되었다. 제2의 천성처럼 자연스러운 습관이 된다. 운동 루틴이 자동화되는 것이다.


*하룻밤을 꼴딱 새고 15시간 이상 깨어있는 집단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8퍼센트로 취한 집단과 마찬가지 정도의 주의 집중력과 반응 능력을 보였다. 즉, 잠을 충분히 자지 않고 일하는 것은 술에 잔뜩 취한 채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꿈꾸며 잠을 잔 시간이었다. 꿈은 정서적 요양을 제공한다. 렘수면 동안 뇌에서 스트레스의 원인인 노르아드레날린의 비율이 거의 바닥까지 떨어졌다. 낮에 느꼈던 혐오, 슬픔 등의 강렬한 감정을 완충하도록 작용한 것이다. 잠을 자라, 그러면 아마 치유 될 것이다. 그러마 아무꿈이나 꿔서 되는 것은 아니다. 깨어있을 때 입은 그 정신적 외상의 감정 및 기분과 명백하게 관련이 있는 꿈을 꿔야만, 과거에 입은 정신적 외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감정을 갖고 나아갈 수 있었다.

(+190613 추가 예정)



잠이 많은 나는 책장을 넘길수록 찬탄을 금치 못했다. 잠이 이토록 소중한 거라니! 수면 과학 만세!! 책을 읽는 동안 그만 잠뽕(?)에 취해버린 나는 잠을 취미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취미는 잠


빰빠밤..빰빰빠밤.. 빰빠밤 빠밤!!!

9시 5분쯤 핸드폰 알람 소리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커지기 시작한다. 아이폰에 취침시간을 설정해놓으면 이렇게 소리가 점차 커지는 방식으로 사용자를 깨워준다. 아침에 가뜩이나 예민해진 신경을 그나마 덜 긁을 방법이다. 늘 전날 밤에는 7시간만 자고 가뿐하게 일어나서 아침 일과를 시작할 꿈을 꾸지만 정작 아침이 되면 10분만 20분만 하다가 결국 비슷한 시각에 일어난다. 아침 10시쯤. 그래도 졸리다. 죄책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늘 잠에 관심이 있었다. 내 인생에서 잠은 중요하다. 가장 잠이 왕성(?)했던 청소년기에는 알람이 없으면 12시간 정도는 우스웠다. 사당오락이라는 고3 때도 소나무처럼 우직하게 7-8시간의 수면시간만은 지켰다. 낮시간에 절대 졸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버텼다.


잠을 많이 자는 만큼 꿈도 많이 꿨다. 사실 하루도 꿈을 꾸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다. 꿈은 파격적이다. 길거리에서 지나친 간판 하나도 기묘하게 얽혀 꿈에 등장한다. 꿈이 퀼트라면 그 날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기워져 꿈 퀼트를 완성한다. 아침에 일어나 ‘우와, 그게 이렇게 엮였다고?’ 하며 꿈의 창의력에 감탄하면 기분전환에 딱이다. 인생의 암흑기에는 재미난 꿈이 유일한 낙일 때도 있었다.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상대를 알아갈 때 빼먹을 수 없는 질문이다. 취미는 정체성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낼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다. 이 세상 사람 수만큼 취미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이력서에서도 꼭 취미란이 있는 게 아닐까? 그림, 음악, 공예. 지난한 삶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건 좋은 취미다. 취미란 그런 거니까. 그렇다면 나는 잠이 취미라고 하겠다. 짜릿할 만큼 신선한 내 무의식을 구경하는 일이 취미라고 하겠다.


취미는 태생적이지도 않고 사회가 부여한 의무도 아니다. 순전한 자유가 보장되는 몇 안 되는 자발적 선택 중 하나다. 그러니 나는 당당한 잠을 자겠다. 취미 생활을 하며 죄책감을 갖는 사람은 없다. 이제부터 내 취미는 잠으로 정했으니, 내 취미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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