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개 알파벳의 늪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극 초반 미국인 남녀가 일본에서 느끼는 낯섦을 잘 보여준다. 바라보는 것마다 생경하고 들이키는 공기마저 낯설다.
호텔 엘리베이터 안. 일본인들이 한가득 타는 순간 이러한 감정은 최고조로 치닫는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한 자신과 다른 사람들, 키가 어깨까지밖에 오지 않지만 어쩐지 위축된다. 빨리 이 엘리베이터에서 탈출하고 싶다. 말이 통하고 자신과 비슷한 누군가를 만나면 당장이라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외로움이 심장을 빨리 뛰게 한다.
정작 일본에선 생각나지 않았던 이 영화가 러시아에서 떠올랐다. 일본에선 주인공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생김새도 비슷하고 교통수단이며 먹는 거며 모두 비슷한 그곳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어를 배우고 있어 글자도 말도 낯설지 않다. 심지어 시차도 없다. 무엇이 그를 답답하게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러시아는 달랐다. 도착한 순간부터 낯설었다. 도처에 널린 글자들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랍어처럼 아예 알아볼 수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알파벳과 비슷하게 생긴 게 문제. 읽고 싶은데 읽을 수가 없어 현기증이 났다. 영화 원제대로 Lost in translation.
불친절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은 무표정한 사람들 속에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길을 묻기도 했다! 나중에 들으니 ~스탄 국가 사람들이 많아 동양인이 낯설지 않다고 한다) 모르면 물어봐야 하는데 무표정하게 있으니 더 위축됐다. 계산하고 영수증을 주기 전 한쪽 귀퉁이를 찍어서 건넬 때면 순간 뭘 잘못했나 싶어 움찔하기도 했다.
다르다는 건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도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낯선 풍경이 눈을 뜰 때마다 ‘아 내가 러시아에 있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줘 즐거웠다. 영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던 키릴 문자였지만 돌아올 때쯤엔 매표소와 24시 영업 표시만은 알아볼 수 있게 됐다. 한국에 없는 백야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영화 '인썸니아'에서 백야는 불면을 불러와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고조시키는 장치로 쓰였는데, 여행지에서 백야는 늦게까지 돌아다니기 편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물론 밖이 환해도 잘 잘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덕인지 24시간 운영하는 가게도 많아 여행하기 불편함이 없었다.